송민정/ 새사연 연구원



새사연은 2008년부터 매 년 진보 정책 연구소 최초로 <전망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경제, 주거, 노동, 복지 분야를 중심으로 세계의 흐름 속에서 한국 사회를 진단하여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사회로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016년 국내 노동시장 동향 분석


1) 실업률의 연속적인 상승


2016년 경제활동참가율은 지난해 대비 소폭 상승하였고, 고용률은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실업률이 상승하여 조사년도인 2007년에서 2016년 중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였다. 지난 3년간 고용지표 개선의 정도가 완만해지고 있는 모습과 함께 구직자가 많아진 것 대비 일자리가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성장이 둔화된 것과 더불어 불안정성이 커진 것이 2016년의 노동시장의 모습이다.


그림 1. 주요 노동시장 지표 : 고용률, 경제활동참가율, 실업률 


앞의 <그림 1>을 참고하면, 고용률은 2016년 1월부터 11월을 기준 60.3% 수준으로 전년 동기와 같은 비율로 나타났다. 2015년에도 상승했던 실업률이 2016년에도 0.1%p 올라 3년 연속 상승하였다. 일자리 증가 폭이 줄어들고 있는 현상이 지속된 결과이다. 2014년 1월부터 11월을 기준으로 2013년 동기 대비 늘어난 일자리의 수는 53만 3천 개였고, 2015년 1월부터 11월을 기준으로 2014년 동기와 대비하면 32만 2천 개로 일자리 수가 큰 폭으로 줄었다. 1월부터 11월까지, 동기간의 2016년 지표에서는 30만 개의 일자리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실업률이 상승한 기간 동안 일자리 수 증가 정도가 확연히 누그러지고 있는 것이 동시에 관측된다.


2) 여성 취업자 수 증가 추세는 주춤, 중고령층 취업은 증가세 계속


<그림 2>는 성별 취업자 수의 변화추이를 2007년부터 증감추이와 함께 나타낸 그래프이다. 2016년 1월부터 11월을 기준으로, 전년 동기 대비 여성 취업자 수는 15만 1천 명이 증가하였다. 1월부터 11월까지 같은 기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2013년 대비 2014년은 27만 명 증가, 2014년 대비 2015년은 19만 5천 명이 증가하였다. 즉, 지난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지속적으로 상승세에 있던 여성 취업자 수 증가폭이 2년 연속 축소되고 있다. 반면 남성 취업자 증가 폭은 2015년 같은 기간 대비 약간 증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성별 취업자 수 증가폭이 차이가 있었던 것에 비해 2016년에는 여성 취업자 증가수와 만성 취업자 증가 수가 거의 비슷한 수치로 나타났다.


그림 2. 성별 취업자 수 및 취업자 증가 폭


취업자 수가 증가한 것은 경제활동인구가 증가한 것에서 기인 할 수 있으며, 이와는 별개로 여성 고용률이 낮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성 고용률은 50.2%(남성 고용률 71.1%)를 기록하며, 2007년부터 2015년 사이 최저 47.7%, 최고 49.9%의 고용률을 기록했다. 여성 고용률 내에서는 올라간 수치이지만, 70% 미만으로 떨어진 적이 없는 남성 고용률에 비하면 20%p 가량 낮은 수치이다.


이는 여성들의 취업을 장려하는 정책의 실효성이 낮고, 여성들이 주로 취업하는 산업의 일자리 환경이 여성 당사자에게 호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여성들의 취업시장 진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책으로 일·가정 양립정책이 있다. 그런데 누리과정 예산을 둘러싼 국가와 지자체간 논란과 이로 인한 육아 불안감 및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직장 내 분위기로 인하여 정책의 효과가 떨어지고 있다. 또한, 여성 취업자가 많은 소규모 작업장 및 금융업과 같은 서비스 분야에서 비정규직이 수년 간 관성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나아가 성과연봉제와 같은 노동자에게 불리한 정책을 도입하거나 도입 직전인 시장 상황이 여성 취업자 수 증가세 완화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림 3. 연령대 별 취업자 수 추이


<그림 3>에서 보여주듯이 중고령층 취업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2014년부터 20대와 30대의 취업자 수가 50대 및 60세 이상의 취업자 수가 더 많았는데, 올해는 60세 이상 취업자 수가 20대 취업자 수 보다 약 15만 명 많았다. 2016년 1월부터 11월간 월평균 연령대별 취업자 중 20대 취업자 수가 374만 1천 명으로 가장 적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30대 취업자 수가 563만 9천 명, 40대 취업자 수가 664만 2천 명, 50대 취업자 수가 608만 3천 명, 그리고 60세 이상 취업자가 389만 1천 명으로 집계되었다. 전년 동기 대비 취업자 증감을 보면 20대는 5만 6천명 증가, 30대는 3만 5천 명 감소, 40대는 2만 7천 명 감소, 50대는 9만 2천명 증가, 60세 이상은 21만 8천명 증가하여 특히 60세 이상의 취업자 수가 전체 취업자 증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중고령층 노동자의 증가는 최근 여러 해 동안 지속되는 현상이다. 특히 2000년대 중반 이후 청년층 일자리의 수는 감소하는 반면, 중고령층의 일자리는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결과 2015년에는 20대 청년들의 취업자 규모와 60세 이상 고령층의 취업자 규모가 비슷하였는데, 2016년에는 60세 이상 고령층 취업자가 청년 취업자 수를 넘어섰다. 조사기간 중 금융위기 이전인 2007년 20대 청년층과 50대 중고령층의 규모와 비교해 보면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당시에는 20대 청년층 취업자의 수가 399만 2천명, 50대 중년층 취업자 수가 409만 3천명으로 10만 명 정도의 차이가 났다. 그러나 현재는 약 234만 명가량 차이가 난다. 또한 60세 이상과 비교했을 때 20대 청년 취업자는 60세 이상 취업자보다 137만 4천 명이나 많았지만 9년이 지난 2016년 현재 1월에서 11월 기간에는 오히려 14만 4천명 적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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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진/ 새사연 이사

 


오래전 지중해 동쪽 끝 연안 어딘가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종이 셋 있었는데 그가 보기에 각자 재능이 달랐다. 어느 날 부자는 멀리 떠날 일이 생기자 그 중에 제일 능력 있어 보이는 종에게 다섯 달란트, 다음으로 능력 있어 보이는 종에게 두 달란트, 그리고 나머지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다. 주인이 돌아와 종들을 불러 모으니,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열심히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의 이문(利文)을 남겼고, 두 달란트를 받은 종도 열심히 장사를 하여 두 달란트를 이문으로 남겼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들고 왔다.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이자라도 받았으면 조금이라도 이문이 남았을 텐데 그 종은 장사도 두렵고 원금을 떼이는 것도 두려워 그냥 땅에 묻어 두었다는 것이다. 부자는 그 종을 어두운 곳으로 내쫓고, 종에게 맡겼던 한 달란트를 열 달란트를 만든 종에게 주었다.


 

이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목자들은 절대주가 내린 재능을 그 은혜를 갚는 일에 써야 한다는 교훈으로 새겨들으라 해석하지만, 교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직장에서 흔히 보는 사장이나 상사를 보는 듯하여 영 씁쓸하다.


 

달란트는 금과 은의 무게를 재는 단위였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성경의 기록만을 놓고 따져보면 6천 드라크마에 해당한다. 그리스 지역에서 1드라크마는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은의 무게였다. , 1달란트는 6천 일치 품삯에 달하는 매우 큰 양이다.


 

달란트는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변형된 발음이며, 고대 그리스식 발음으로는 탈란톤(τάλαντον), 라틴어로는 탈렌툼(talentum)에 가깝다. 미국식 영어로는 탤런트(talent)이다. 익히 알다시피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은의 무게나 화폐의 단위라는 본래의 의미 대신 재능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과거에 은의 무게를 재는 단위가 재능으로 바뀐 것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부의 축적이 개인의 재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는 인식이 굳어진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못마땅하기도 하다. 목자들의 해석처럼 달란트는 그 달란트를 부여한 절대주를 위해서 써야 되는 것이라면, 각자의 재능은 사익만을 위해서 써서는 안 된다. 재능은 사회적으로 얻어지기도 하므로 사회를 위해서도 써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샌델의 하버드대학 강의를 듣다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노력이라는 재능을 오로지 개인의 것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논박이 오고가는 과정에서 하버드대학에 들어오기까지 스스로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 성과는 개인이 가져가는 것이 맞다는 매혹적인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샌델이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집에서 첫째로 태어난 사람 손 들어 보세요.” 대부분의 학생이 손을 드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어서 첫째로 태어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할 확률이 높다는 통계분석결과를 들려준다. 사회적 구조도 개인의 노력에 영향을 끼친다.


 

신자유주의자 또는 경쟁주의 옹호론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개인의 노력은 오로지 개인의 것이며, 따라서 노력을 통해 얻어진 재능도 오로지 개인의 것이고, 그 재능을 통해 축적한 부도 오로지 개인의 것이라는 달콤한 논리이다. 이 논리체계에서는 세금은 개인의 노력을 강탈하는 도둑질이라는 궤변도 성립한다. 하지만 우리는 개인의 재능이 출발선이나 기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달란트를 재능으로 보는 관점에 동의하고 동양사상에서 비슷한 것을 고르라 한다면, 첫음절의 음가가 으로 서로 비슷한 덕()을 고를 수 있다. 덕에는 크다는 뜻이 있다. 능력 및 작용이라는 뜻도 있으며 베풀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은혜이기도 하며 복()이기도 하다. 본래 덕은 바로 보다()’라는 뜻과 행한다()’라는 의미가 합쳐졌기에 이처럼 다채로운 뜻을 가지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재능이란 바로 보고 행함이다. 당연히 옳은 일을 행하고 베푸는 것이 재능이다.


 

덕과 함께 짝으로 쓰이는 것이 업()이다. 업은 일을 뜻한다. 순서라는 뜻이 있고, 잇는다는 뜻도 있다. 그러다보니 기초라는 뜻도 있고, 공적을 뜻하기도 한다. 일을 조심히 하라는 뜻인지 두려움, 위태로움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일이라는 의미에서 보자면 서구의 달란트와 좀 더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다.


 

불교가 한자문화권으로 넘어오면서 카르마(Karma)가 업으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카르마는 일차적으로 행위를 뜻하는 말이지만 힌두문명권에서는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이 연쇄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악행은 악행을 불러오고 선행은 선행을 불러오는 식으로 무한하게 연결된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덕업을 쌓으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선의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나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선행도 이러한데 하물며 이익을 밝히는 일은 오죽하겠는가. 경쟁에 기대어 경제행위를 하면 손해보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자신이 쌓은 부가 오롯이 자기 노력 때문이라 보기 어려운 이유이다. 또한 일을 함에 있어 나쁜 영향이 있지는 않은지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는 사상의 배경이기도 하다.


 

카르마는 윤회와 결합하면서 힌두문화권 특유의 지독한 사회계급체계를 낳았다. 자신이 천민으로 태어난 이유는 전생의 죄업 때문이라는 지배층의 논리로 쓰인 것이다. 이처럼 아무리 좋은 사상도 욕심 많은 기득권에게 악용되면 사회전체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민중이 끊임없이 주류나 상식이라는 지식체계를 곱씹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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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길/ 새사연 이사


촛불시민혁명! 너도나도 혁명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혹자는 사회구조적 변동을 수반하지 않았다하여 신중한 태도를 보이지만 아직은 초기 단계인 만큼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될 것 같다. 무엇보다도 혁명의 가장 중요한 척도인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주체 세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촛불시민혁명의 주역은 그 어떤 조직 동원과 무관하게 오로지 개인의 결심에 따라 참여한 ‘자발적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참가자의 70~90퍼센트를 치지했으며 촛불시민혁명의 전 과정을 지배했다. 시민들은 특정 리더에 의존하지 않고도 (소설가 이문열이 북한의 아리랑 축전을 보는 것 같다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탄탄한 연대와 통일성을 과시했다. 더불어 비폭력 평화시위를 바탕으로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대의 기구를 자신들의 통제 아래로 끌어들이는 탁월한 전략 능력을 선보였다. 시민 스스로가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다. 이러한 리더십은 특정 개인이나 소수 그룹으로부터 나온다는 종전의 통념을 뒤집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촛불시민혁명은 가슴 벅찬 첫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앞날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탄핵 절차는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고, 정권교체가 온전하게 이루어질 지도 미지수이다. 게다가 야권 혹은 진보세력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상황을 맞이했다. 아직도 그들은 촛불시민혁명을 어떻게 발전시켜 가야 할 지 감을 못 잡고 있다. 그 반대편에서 보수 기득권 세력은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을 가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결국 온갖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은 고스란히 촛불시민혁명 주역들의 몫이 되고 있다. 과연 이들이 최우선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는 무엇일까?


프랑스대혁명으로 읽는 시민운동의 교훈


이 시점에서 근대 혁명의 빅뱅이라 불리는 프랑스대혁명을 되짚어보는 것이 도움 될 것 같다.프랑스대혁명은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이 압제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날부터 1814년 부르봉 왕조가 복귀한 순간까지 장장 25년에 걸쳐 진행된 거대한 드라마였다.


바스티유 감옥 점령과 함께 폭동이 프랑스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구체제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이 이루어졌다. 권력은 왕정과 시민들의 대표기관인 국민의회로 양분되었다. 신흥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던 국민의회를 앞세워 입헌군주제를 골간으로 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했다. 선거권은 400만 명의 부유한 남성에게만 부여되었다. 선거권을 갖지 못한 노동자와 가난한 민중 사이에서는 불만이 쌓였고, 급진적 정치 결사체인 자코뱅 클럽과 하층계급 출신 혁명가 단체인 상퀼로트를 중심으로 민중세력은 급속히 모여들었다.


한편 프랑스 반혁명 인사들의 거점이자 루이16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 손잡고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그러자 파리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민중세력은 전면에 나서서 정세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프랑스대혁명은 제2의 혁명을 거치며 빠르게 왼쪽으로 이동해 갔다. 상황은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반혁명 세력을 생물학적으로 제거하려 한 공포정치가 실시되면서 극한으로 치달았다. 1793년 6월 10일부터 7월 27일까지 짧은 기간 동안 1천여 명 이상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공포정치는 시민들을 등 돌리게 했고 민중세력 내부의 분열을 초래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이 고안한 단두대에 의해 처형되는 것으로 공포정치는 막을 내렸다. 이후 프랑스대혁명은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혼미를 거듭했다.


상황을 수습한 인물은 다름 아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 평민 출신인 나폴레옹은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계속되는 혁명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정국의 주역으로 부상해 있었다. 나폴레옹은 일련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손에 넣었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나폴레옹의 통치 아래 정국은 안정되었고 경제는 활력을 되찾았다. 농노제 폐지 등 대혁명이 남긴 과제들은 법제화되었다.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법원, 학교 등에서 근대적 모델이 확립되었다.


군주제는 대혁명의 주요 청산 대상이었다. 기묘하게도 프랑스대혁명은 군주제의 손을 빌려 혁명 과업을 계승하는 모순된 상황을 보였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모순을 혁명전쟁의 지속적 승리를 통해 완화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이 모든 것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결국 나폴레옹은 밀려났고 최종적으로 부르봉 왕조의 복귀와 함께 대혁명도 막을 내렸다.


프랑스대혁명은 극가 극을 오갔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민주공화제를 안착시키는데 이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대혁명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시피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프랑스대혁명의 가중 중요한 장면의 하나가 있다.


잃어버린 좌표를 찾아서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한 직후인 1789년 8월 26일 새로운 질서를 담은 ‘인권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선언)이 발표되었다. 인권선언은 1조에서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명시하는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천명함으로써 프랑스대혁명이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창출했다. 인권선언은 대혁명 주체의 뇌리에 아로새겨졌고 대혁명이 움켜쥐고 나아가야할 좌표로 자리 잡았다. 좌표가 뚜렷해짐으로써 대혁명은 일시적 후퇴나 좌초를 겪더라도 항해를 지속할 수가 있었다.


세상을 바꾼 혁명적 과정 앞에는 늘 좌표가 뚜렷했다. 그것들은 ‘민주화’, ‘자주화’, ‘사회화’ 등으로 집약되어 표현되어 왔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은 뒤이은 양김씨(김대중, 김영삼)의 분열과 군부정권의 연장, 3당 합당 등으로 극도로 뒤틀렸다. 그럼에도 민주화 정착이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되었던 것은 민주화라는 좌표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촛불시민혁명을 이끌어갈 좌표는 무엇인가? 누구도 분명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보편적 가치를 함축한 좌표가 뚜렷하지 않다! 이는 촛불시민혁명이 지도와 나침반 없이 항해하다 자칫 좌초될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바로 여기서 촛불시민혁명이 최우선적으로 풀어야할 숙제가 무엇인지가 밝혀진다. 아무리 둘러 봐도 답은 밖에서 찾을 수 없다. 답은 오직 촛불시민혁명 내부에 있다.


전통적 관점에서 볼 때 촛불시민혁명의 주역인 시민들은 제대로 조직돼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조직되지 않은 채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 조직된 것도 아니었고 조직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시민들이 맺은 관계망은 전혀 새로운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을 담을 유일한 개념은 ‘생태계’이다.


생물학의 발전은 자연 생태계에 대한 전통적 관점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해 왔다. 그 결과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생태계의 주인은 생명체이다. 생명체는 환경에 적응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능동적 주체이다. 단적으로 우리가 늘 들이마시는 산소도 태초의 생명체인 시아노박테리아가 수십억 년에 걸쳐 만들어낸 것이다. 둘째 생명체는 저마다 세계에서 중심적 존재이며 위계질서는 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존재한다. 심지어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지구의 진정한 주인공은 식물이며 동물은 그들의 종 번식을 돕는 조연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셋째 공존공생과 연대협력이 생태계를 작동시키는 기본 원리이다. 이를 바탕으로 미생물과 식물, 초식동물 등 ‘약자’들은 개체수와 생존율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가 있었다.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장면인 세포 출현도 서로 대립하던 호기성 박테리아와 혐기성 박테리아가 미토콘드리아와 세포핵으로 공존공생의 길을 선택함에 따라 이루어졌다.


촛불시민혁명으로 되돌아보자. 촛불시민혁명의 주인은 사회적 생명체인 사람이다. 이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촛불시민혁명에서는 참가자의 재산을 따지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도 묻지 않았다. 나이를 따지는 것조차 금기시 되어 갔다. 오로지 사람이라는 가치 척도 하나로 만났다. 이는 촛불시민혁명이 낡은 질서의 대척점에 있는 해방공간임을 의미한다. 촛불시민혁명 참가자는 그 어떤 위계질서도 용납하지 않았다. 나를 대표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이었다. 저마다의 세계에서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SNS를 기반으로 강력하고 광범위한 연대협력을 추구했다. 신기하리만치 생태계의 세 가지 특징을 정확히 구현했던 것이다!


시민들은 광장을 ‘점령’(이는 앞으로 매우 고귀한 용어가 될 것이다.)했고 그 과정을 합법화시켰다. 촛불시민혁명이 거둔 첫 번째 승리다. 시민들은 광장을 플랫폼 삼아 강력한 생태계를 형성했다. 시민들은 빠르게 익숙해졌고 나아가 능숙해졌다. 시민들은 바로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꾸어 나갈 것이다. 시민들은 정당, 국회, 국가, 재벌 등 기존 영역들을 정치적 법리적으로 점령해 가면서 이들을 플랫폼으로 하는 생태계를 형성해 나갈 것이다. 그럼으로써 낡은 세계를 혁파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생태화’*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생태화! 몹시 낯설다. 하지만 혁명은 언제나 낯선 세계와 대면하기 마련이다. 혁명은 익숙한 세계와의 과감한 결별을 요구한다.


*생태화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과 과정은 『시간의 대화』(근간)으로 발표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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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운/ 새사연 연구위원


2017년 우리경제 전망은 밝지 않다. 가계부채, 청년실업, 자살률 등 대부분의 경제지표가 우울하다. 경제는 좋을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상황마다 적절한 타개책이 마련되어 슬기롭게 상황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한 정책은 긴요하다. 이 글은 30년 이상 장기침체를 겪고 있는 일본에서 지난해 9월 위기 타개책으로 새롭게 들고 나온 장기국채금리목표제라는 통화정책을 검토한다. 경제정책은 실험이 불가능하다. 실패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웃나라의 정책을 잘들여다는 것으로 실험을 대신할 수 있다.



아베노믹스가 노린 두 마리 토끼


지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위기를 극복하고 경기를 부양한다는 취지하에 도입된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정책들 대부분은 화폐적 해법이었다. 대표적인 화폐적 해법으로는 양적완화정책이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가 도입하여 유명하게 된 양적완화는 사실 일본은행이 1990년대 10년 공황을 극복하고자 2000년대 초반에 도입한 것이다.


2000년대 일본의 양적완화는 특별히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그러던 중 아베 신조가 새로운 총리대신이 되면서 재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2013년 4월 초 봄에 다시 도입된 아베노믹스는 이전과 달리 양적 완화 뿐 아니라 질적 완화가 결합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9월 일본은행이 도입한 장기국채금리목표제는 2013년 양적-질적 완화의 심화된 버전이라 할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화폐적 해법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즉 실물경제를 자극하고 반영하기보다 화폐적 지표를 중심으로 실물경제를 회복시키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 글은 지난해 9월 일본은행이 발표한 장기국채금리목표제가 그동안의 화폐적 해법과 같은 분류로 묶이며, 실제로는 실물경제를 반영하고 이를 움직일 수 있는 직접적인 경기침체 타개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더불어 자넷 옐런 연준 의장의 화폐적 해법을 간략하게 검토할 것인데, 이를 통해 같은 화폐적 해법이라도 긍정적인 시도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일본의 ‘질적’통화정책, 장기국채금리목표제


지난 해 일본은행이 도입한 장기국채금리목표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도입된 양적완화정책, 마이너스기준금리 같은 새로운 통화정책들의 연장선에 있다. 단연코 그 중 최신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버냉키는 지난해 9월 일본은행이 새로운 통화정책 조치를 발표하고 난 직후, “디플레이션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며 일본은행의 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기존 양적완화 정책이 주로 국채 거래의 “물량”을 중심으로 수행된 것이라면 이번 장기국채금리목표제는 국채 거래의 “가격”, 즉 질적 측면에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존에는 일본은행이 일본 정부로부터 국채를 대규모 매입하여 화폐를 공급하겠다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국채의 목표금리를 0%로 설정하고 이를 달성할 때 까지 무제한으로 국채를 매입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7년~12년 국채만을 매입한다는 규칙 폐기하고 모든 만기의 국채를 매입하기로 하였다. 결국 핵심은 ‘민간 경제 참여자들의 인플레이션 기대를 변경시켜 경기부양을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즉 기존에는“인플레이션 기대”를 변경시키기 위해 화폐적 해법을 수행하였다면, 이제는“인플레이션 기대”가 반영된 경제지표 자체를 변경시켜 마치“인플레이션 기대”가 변경된 것 마냥 경제여건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제선행지표인 장단기 금리 격차(수익률곡선)를 변경시키는 것이 일본은행 정책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장단기 금리 격차는 향후 경제를 미리 가늠할 수 있는 선행지표로서 활용되곤 한다. 장단기 금리 격차는 단기 국채 금리와 장기 국채 금리로 구성되는데, 단기 금리가 낮고 장기 금리가 높으면 정상적인 경우로 간주하고 이를 향후 경제 전망이 밝다고 해석한다. 이 경우 은행도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은행은 낮은 단기금리로 예금을 받아 높은 장기금리로 대출 해주는 예금대출업무를 기본으로 하는데, 이 격차가 은행이 벌어들이는 수입이다. 따라서 장단기 금리 격차가 평평하면 은행 수익률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정상형은 수평형 보다 크지 않게 가파른 형태이다. 소폭 우상향하는 형태가 정상형으로 경기전망이 밝은 유형으로 본다. 그렇지 않고 우측 그림처럼 상승형이되면 미래 경제 전망에 대한 리스크가 상당하다는 것을 장기금리가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경우, 단기금리를 아무리 낮추더라도 장기금리에 영향을 미치기 곤란한 상황이 된다. 케인스가 기업가에게 기업가 정신의 일종인 “야생적 충동(animal spirit)”을 주문한 상황이 바로 이 경우다. 금리가 낮아서 차입비용이 낮고 이 덕택으로 생산단가가 낮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미래 경기 전망이 불투명해서 투자를 꺼려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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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정승일/ 새사연 연구이사 


필자는 앞으로 진짜 경제민주화를 논의할 때 혁신산업과 약탈산업(이권산업)을 구별하는 관점에서 대기업 및 재벌그룹에 관한 설명을 보완해갈 것이다. 역으로 야권 경제학자들의 재벌개혁론 및 경제민주화론에도 혁신경제와 약탈경제(이권경제)를 질적으로 구분하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현실 통계를 보면, 혁신산업과 수출제조업보다는 내수산업 안에서 재벌을 포함한 대다수 대기업들이 하청 중소기업을 쥐어짜는 약탈적 경영을 일삼아왔다.


대다수 대기업들이 하청 중소기업들을 쥐어짜며 약탈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정운찬과 장하성, 홍장표 같은 야권 경제학자들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로 대표되는 수출제조업 대기업들이 하청기업 쥐어짜기의 주범, 따라서 근로소득 불평등의 주범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현대자동차 1차 하청업체의 임금은 현대차의 60% 수준이고 2차 하청기업의 임금은 그 1/3 수준이며, 3차 하청기업의 그것은 1/4 수준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단계적 임금 격차는 왜 발생하는 걸까? 야권 경제학자들은 입을 모아 재벌계 수출 대기업들의 ‘하청 갑질’이 대기업-중소기업 간 임금소득 불평등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성토한다. 그런데 과연 그게 사실일까?


우리나라에는 약 50만 개의 기업이 있고 그 50만 개 회사의 총매출액에서 재벌그룹 소속 100대 대기업의 매출은 29%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들 100대 재벌 대기업이 고용한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4%에 불과하다. 반면에 중소기업은 전체 노동자의 72%를 고용하고 있는데도 기업 총매출액의 35%만을 차지한다. 가장 심각한 불균형은 순이익인데, 100대 대기업이 모든 기업 순이익의 60%를 차지하는 반면에 중소기업의 순이익은 35%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에서 많은 양식 있는 이들이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수익성 격차가 중소기업의 지불능력을 압박하고 있고 그 때문에 중소기업의 임금이 낮다’고 주장한다.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로 측정한 수익성에서 중소기업의 영업이익률은 대기업의 1/2 수준, 생산성은 1/3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에 대기업-중소기업의 임금 격차가 벌어졌다는 설명이다.


요약하자면, ‘중소기업에 만연한 저임금의 궁극적 원인은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재벌계 수출대기업들의 불공정한 하청 단가 등 불공정 거래’라고 대다수 경제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성토한다. 대기업-중소기업간 하청거래의 최정점에 있는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초대형 재벌 제조업체들이 일자리는 만들어내지 않으면서 하청 단가 인하를 통해 하청기업 수익마저 빼앗아버리며, 해서 절대 다수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의 수익성이 떨어지고 이로 인해 그 회사들이 저임금 밖에 지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높은 수익성은 하청업체 쥐어짜기 덕분?


먼저 짚고 넘어갈 질문이 있다. 과연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의 높은 수익성이 하청업체를 쥐어짠 덕분에 발생한 것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첫째, 현대차와 삼성전자가 2009〜2013년간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의 원천은 수출시장 즉 세계시장에서의 매출 호조 덕분이다. 여기에서 수출시장은 경제학자들이 가정하는 완전경쟁 시장에 가깝다.


둘째, 만약 현대차와 삼성전자에서 발생한 고수익의 원천이 원·하청 거래의 불공정성에 있다면 현대차와 삼성전자와 납품하는 1차 하청업체들의 수익성이 그만큼 낮아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실제 그렇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볼 것이다.


셋째, 하청업체의 수익성이 원청 대기업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곳은 현대차와 삼성전자 등이 속한 수출제조업이 아니라 건설과 통신, 유통, IT서비스(소프트웨어) 등의 내수산업 특히 내수서비스 업종이다. 이들 업종에서는 원청 대기업의 수익성이 비정상적으로 높은데 반하여, 이에 반비례해 1차 및 그 이하 하청기업들의 수익성은 비정상적으로 낮다. 정치인 안철수가 유명세를 탄 계기인 이른바 ‘삼성 동물원’ 문제도 이들 업종에서 유별나게 심각하다. 즉 삼성동물원 문제는 삼성전자보다는 삼성SDS(IT서비스), 삼성전기보다는 삼성물산(건설) 등 특정 업종에서 나타난다. 이 점에 대해서도 바로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넷째, 이런 맥락에서 보면 원청 대기업들에 의한 하청기업 쥐어짜기의 약탈적 경제가 가장 크게 문제되는 것은 수출제조업이 아니라 주로 내수산업에서다.


약탈경제 대 혁신경제, 내수산업 대 수출제조업


수출제조업과 내수산업 간에는 질적 차이가 크다. 자동차와 전자 등 수출제조업은 세계시장의 완전경쟁 상태에 노출되어 있으며 따라서 기술력과 품질능력이 핵심능력(core competence)이고 기술혁신이 풍부하게 일어나는 혁신 산업(innovation industries)이다. 이에 반해 건설과 통신, 유통, IT서비스 등의 내수산업은 세계시장이 아닌 내수시장에서 주로 경쟁이 일어나며 기술력과 품질능력보다는 인건비 절감을 통한 비용절감 능력과 그리고 인허가 획득 및 규제완화를 위한 공무원 및 정치인과의 정경유착 능력이 기업의 핵심 경쟁력으로 등장하는 약탈적 산업(predatory industries)이다.


우리는 기술혁신이 주된 경쟁력 있는 산업(주로 제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동시에 저임금 약탈과 하청업체 약탈, 금융고객 약탈 등 약탈과 수탈을 주된 경쟁력으로 삼는 산업(주로 내수 서비스업)을 억제해야 한다. 혁신경제와 약탈경제를 구별하면서, 혁신경제 영역은 키우고 약탈경제 영역은 해체시켜 나가야 한다. 이것은 그 산업의 주역이 재벌그룹이건, 일반 대기업이건, 아니면 중소기업 또는 벤처기업이건 상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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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