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일/ 새사연 연구이사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가 거의 두 배 이상 벌어지며, 근로소득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기업의 불공정한 하도급 거래 척결과 이익공유제와 성과공유제, 그리고 징벌적 손해배상제 등이 진보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되어 왔다. 하지만 이 정책을 통해 전체 중소기업에 돌아가는 경제적 효과는 현실에서는 연 10조원이 안 된다. 지난 5년간 상장회사 대기업 전체 영업이익 총액은 연평균 100~130조 원이며, 이의 3/4는 10대 재벌 대기업의 몫으로 돌아가는 현실과는 대조를 이룬다.

 


다시 한 번 야권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논리를 상기해보자. 그들은 다음과 같은 3단계 논리를 전개한다.


첫째, 한국에서 불평등은 부(재산)의 불평등보다는 소득 불평등 때문에 발생하며 재산소득 불평등보다는 근로소득(노동소득) 불평등이 주요 원인이다. 그러므로 재산(부)의 불평등을 주요 테제로 하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한국에 맞지 않다. 신자유주의가 오늘날 경제 불평등의 주요 원인이라는 테제도 한국경제에는 맞지 않다.


둘째, 한국경제의 불평등은 주로 중상주의 또는 전근대적 경제구조 때문에 발생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근로소득 불평등이 일어나는 주요 원인은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 불평등으로 이 두 가지이다.


셋째, 이 두 종류의 근로소득 불평등을 야기하는 궁극적 원인은 재벌그룹 또는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다. 따라서 재벌그룹 또는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축소 또는 해체하고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구축하지 않고서는 소득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다.


이 3단계 논리 중에서 첫 번째는 앞에서 다루었다. 여기서는 둘째와 셋째를 다루어보기로 하자. 과연 둘째와 셋째의 논리가 우리 경제의 현실에 부합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대기업-중소기업 간에 벌어지는 임금 격차


먼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부터 확인해보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 불평등은 실제로 심각하다. 그림 1에서 보듯이 2014년 현재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 격차는 거의 두 배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정규직 직원들이 평균 연봉 2천5백~4천만 원을 받을 때 대기업 직원들은 평균 5천~8천만 원가량을 받는다. 대학생들이 취업 재수까지 해가면서 기를 쓰고 대기업과 은행, 공기업 등에 취업하려 애쓰는 현실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늘 그런 격차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1980년 초중반까지만 해도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원들의 봉급은 대기업 직원의 97%였으니,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 격차는 거의 없었다. 한국경제가 매년 8~10% 성장하던 1960〜70년대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전체 근로자의 47%가 대기업에 근무하고 나머지 53%가 중소기업에 근무했다.


그런데 30여년이 지난 2014년에는 중소기업 봉급 수준이 대기업의 60% 수준으로 떨어졌다. 제조업의 봉급은 대기업의 53%로, 거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동시에 전체 근로자 일자리 중에서 월급이 많은 대기업 일자리는 19%로 비중이 줄었고 나머지 81%는 월급이 적은 중소기업 일자리이다. 근로소득의 81%가 낮은 임금의 중소기업에서 발생하니 근로소득 불평등이 악화된 것은 당연한 현상으로 보인다.



민주화와 함께 임금 격차가 벌어진 이유는 기업별 노조운동의 장벽


야권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인정하듯이, 19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임금 격차는 크지 않았다. 또한 재벌기업 등 대기업들은 요즘보다 훨씬 많은 정규직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었다. 그만큼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근로소득 격차가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고, 대기업 취업도 지금만큼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야권 경제학자들이 “대기업-중소기업 간 양극화와 임금 격차의 역사적, 구조적 뿌리”라고 비판하는 바로 그 시기, 즉 중상주의적 국가 주도 및 대기업 주도 경제성장의 전성기가 아니던가?


그런데 앞의 그림 1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대기업-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가 급격하게 벌어진 첫 번째 시기는 다름 아닌 1980년대 말이다. 특히 1987년부터 1990년의 4년간 가장 빠르게 임금 격차가 벌어졌다.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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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아/ 새사연 연구위원




봄 농활에 가서 농사일의 고단함을 느끼며 열댓 명이 함께 하루 종일 모내기를 했는데 절반의 일밖에 끝내지 못했다고 했다. 청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막걸리 두어 잔을 들이키던 농부 아저씨는 해질녘이 되자 지친 청년들에게 나오라고 하고 이앙기를 몰아 나머지 절반의 일을 순식간에 끝내버렸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적고 그나마 그들은 나이가 많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농업 종사자들이 힘들고 어려운 결정적인 이유는 고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농사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논리에 의한 정치와 시장의 외면에 있다. 농부 아저씨는 농업을 외면하지 않는 어여쁜 청년들에게 시원한 막걸리 맛을 알려주려고 오히려 일거리와 시간을 내준 셈이다.


군대에 가면 삽질을 한다고 한다. 삽질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청년들에게 삽을 하나씩 주고 파내려 가면 몇 시간이 걸려야 사람 키만한 구덩이를 만들 수 있을까? 같은 크기의 구덩이를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파내면 순식간이다. 이를 모를 사람이 없는데도 청년들에게 삽을 쥐어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높은 연봉을 받는 소수의 군인들로만 군대가 운영된다면 포크레인은 놀고 있는데 군인들이 괜시리 삽질을 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 노동자들이 받는 평균적인 임금 수준이 낮은 까닭은 낮은 노동생산성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최저임금을 쉬이 올릴 수 없는 것도 낮은 노동생산성에 일부 원인이 있다고 한다. 낮은 노동생산성과 낮은 임금 수준은 분명 공존하는 현실이다. 우리가 천국처럼 여기는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우리와는 정반대로 높은 임금수준과 높은 노동생산성이 공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낮은 임금이 낮은 노동생산성에서 기인한다는 추론에는, 임금 수준이 실제로 노동생산성에 근거하여 결정되는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고 보더라도 의심해야 하는 전제들이 있다.




첫째, 노동생산성은 적은 노동을 투입해서 많은 생산물을 산출했을 때 높다고 한다. 총생산량을 총노동량으로 나누어 계산하는 노동 한 단위당 생산량이 위 식 화살표 왼편의 단위당 노동생산성이다. 그렇지만 대체 ‘생산량’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회의 노동 한 단위당 생산량은 빌딩 0.1개와 휴대폰 500개이고, 다른 사회의 노동 한 단위당 생산량은 빌딩 0.11개와 휴대폰 200개라고 하자. 어느 사회의 노동생산성이 더 높은가? 1970년대 영국 중심의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자들과 미국 중심의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 간의 ‘자본논쟁’의 핵심 이슈는 이 문제와 연관된다. 결론은 생산물 각각의 가격을 곱하여 더하는 방식이 심각한 논리적 오류를 안고 있으므로 ‘해결 방안’이 될 수 없다는 쪽으로 났지만, 본고에서는 일단 현재 경제학이 취하고 있는 이러한 방식으로부터 더 나아가지 않는다.


생산물마다 단위가 달라 단순히 합산하여 계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단순한 방식은 생산물의 가격을 모두 더해서 시장 가격으로 노동생산성을 환산하는 화살표 오른편의 부가가치 노동생산성이다. 이 방식 하에서 빌딩 0.01개보다 휴대폰 300개가 더 비싸다면 빌딩을 더 많이 생산한 사회의 생산성이 더 높은 결과로 귀결된다. 자, 이제 묻자. 빌딩보다 휴대폰을 더 많이 생산하도록 하는 결정은 누가 했을까? 시장은 빌딩을 더 원하는데 휴대폰을 더 생산하는 결정이 부가가치 노동생산성 저하의 원인이라면, 이때 낮은 노동생산성의 원인은 누구에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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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칼럼은 2016년 7월 25일 한국비정규센터의 정책칼럼으로 게재 된 글입니다.
출처 : http://workingvoic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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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진/ 새사연 연구원 





회계의 시작 : 계약과 재산의 ‘체계적인’ 관리



아주 오래 전 에리두(지금의 이라크 디 카르 지역) 동남쪽 마을에 살던 에아는 수십 마리의 소를 기르고 있었다. 어느 해 여름 심한 홍수로 기르던 소를 모두 잃은 이웃마을 친구 아다드가 암소 세 마리와 수소 한 마리를 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암소가 새끼를 낳아 총 열 마리의 소가 생기면 그 중 건강한 암소 네 마리를 받는 조건으로 에아는 아다드에게 소를 내어 주었다. 지병이 있던 에아는 얼마 후 숨을 거두면서 아들 엔키에게 때가 되면 아다드에게 빌려준 소를 받아오라고 일러둔다.

몇 년이 지난 후 엔키는 약속된 소를 받으러 아다드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얼마 전 아다드는 숨을 거두고 아들인 벨이 소를 키우고 있었다. 엔키는 벨에게 에아에게 들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소를 돌려달라 하였으나 벨은 아다드에게 전해 들은 바가 없다고 난색을 표하였다. 황당한 마음에 엔키는 촌장인 아누에게 중재를 청하였다. 사정을 들은 아누는 엔키에게 “약조를 증명할 방법이나 증표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엔키가 “아버지 에아의 유언 말고는 증표가 없다.”하니, 아누는 “엔키의 말만으로 약조를 증명할 수 없으니, 벨에게 소를 내어주라 할 수가 없다.”라고 결정하였다. 아다드가 소를 끌고 가는 걸 직접 보지도 못한 엔키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고 발걸음을 돌렸지만,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을 리 없는데…. 서로 약조를 할 때는 확실히 기록하고 인장을 꾹꾹 눌러 찍었어야지….’라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사이의 유적지, 즉 수메르를 비롯한 옛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유적지에서는 쐐기문자가 빽빽이 적힌 점토판이 많이 발굴된다. 점토판의 내용을 해석해보면 반인반수의 영웅 길가메시의 서사시처럼 신화나 역사와 같은 기록뿐만 아니라 가축의 수효 등 재산을 기록한 내용도 많으며, 상호간의 인장을 찍은 계약의 내용도 종종 발견된다. 위의 소를 둘러싼 이야기는 숫자로 빽빽한 점토판 기록이 왜 필요했을지 상상하며 만든 내용이다. 아마도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회계장부일 이 점토판들처럼 초기의 회계는 자신의 재산목록이나 계약을 잊지 않기 위한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또한 회계의 시작은 고대 로마를 살펴보면 교육을 받은 노예가 주인을 대신하여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주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재산관리를 노예에게 위임한 후, 자신의 재산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그 결과 기장 방법이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발달하였으며, 재산정보의 전달 수단으로서 회계의 기능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중세부터는 재산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집사라는 직군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그들에 의한 대리회계가 발달한다.



회계의 발달 : 중개무역의 발달과 복식부기 원리의 등장


중세유럽의 경제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국가에 의해 주도되었다. 특히,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중개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과거에는 거대한 제국에서는 다뤘을 법한 규모의 거래가 상인집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상업의 관계자가 소수의 특권계층에서 다양한 상인계층으로 전환됨에 따라 채무와 거래 관계가 고도로 복잡해지기 시작했고, 상업과 관련된 분쟁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상인이 자신의 채무를 깜빡한다면,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과 같은 잔혹한 채권자에게 살을 깎일 위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세 상인들의 회계장부는 거래 상대자를 별도의 계정으로 분류하여 채권⋅채무 및 거래 사항을 세세하게 기록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책임을 분명히 하는 회계기법은 후일의 분쟁을 최소화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화시대 신용경제의 초석이 되었다.


중세를 거쳐 체계화되기 시작한 “자산은 부채와 자본의 합과 같다.”는 복식부기의 원리는 괴테로부터 ‘인간의 지혜로 창조된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라는 찬사를 이끌어내기에 이른다. 르네상스 이후 시민혁명을 거쳐 변화된 사회 위에서 발생한 산업혁명은 서구사회의 급격한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에 대한 자신감에 도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번영의 상당 부분이 빈곤층과 식민지라는 약자로부터 수탈한 것임을 제대로 인지했다면 조금 다른 평가를 해야 하지 않았을까.



회계발달의 그림자 : 정경유착과 공인회계사의 등장



“나는 천체의 움직임까지도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계산할 수가 없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정립한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뉴턴이 주식투자에 실패하여 약 2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20억 원)를 날리고 난 뒤의 푸념이다. 사실 뉴턴이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투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부의 공인을 받아 설립된 공기업이 정부와 의회의 요인들과 결탁하여 사기행각을 벌였는데 속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전 재산을 잃고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영국 전체에 넘쳐났다.


사건의 발단은 영국 정부가 떠안은 천문학적인 부채로부터였다. 당시 영국은 식민지 경영을 위해 동인도회사 등 공기업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설립하고 이들의 식민지 진출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일삼았고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부채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식민지 경영을 통해 얻어진 이익의 대부분이 정부에 돈을 빌려준 자본가 집단에게 돌아갔으나, 정경유착으로 인해 정부재정으로 환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대한 정부의 부채를 털어내기 위해 1711년 남미지역 무역 독점권을 지니는 남해회사(The South Sea Company)가 설립되었다. 남해회사의 독점권은 국채 900만 파운드(현재가치로 약 9천억 원)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부여되었다. 이 회사의 설립이 기획사기라는 점은 이미 ‘남미지역 무역 독점권’에서 드러난다. 당시 남미는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영국은 오랜 기간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고 있어 서로 적대적인 관계였다. 당연히 스페인이 무역을 허가할 이유가 없었고, 영국정부와 의회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즉, 남해회사의 경영실적이 있을 리 없었다.


1720년에 이르자 남해회사의 경영손실은 손을 쓰기 어려울 지경에 된다. 관계자들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한탕 크게 사기를 칠 계획을 세운다. 남해회사는 정부부채 3,200만 파운드(현재가치로 약 3조2천억 원)를 저리로 인수하는 조건으로 주식을 제한 없이 발행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다. 그리고 남미 전 항구에 대한 기착권을 땄다거나 은광산으로 유명한 ‘포토시’의 채굴권을 얻었다는 등의 헛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려 주가를 조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가 보증한 유망한 공기업’에 투자한 결과, 1720년 1월에 주당 128파운드에 불과했던 주가가 6월에는 주당 1,050파운드로 치솟았다.


하지만 주가가 상승한다고 해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하는 기업이 이익을 낼 수는 없다. 6월 이후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주가는 급락하기 시작하였고 12월에는 원래 수준인 주당 120파운드가 되었다. 분노한 시민들을 달래고자 몇몇 핵심관계자를 강하게 처벌하였으나 영국 정부와 의회가 어느 정도까지 개입되었는지는 사실상 은폐되었다. 그나마 이 사건을 계기로 제3자에 의한 회계감사가 제도화되기 시작하였다. 공인회계사라는 개념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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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길 / 새사연 이사 




다시금 2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이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떠올려 보자. 독일군은 상상 초월의 시가전을 거듭한 끝에 시가지의 80퍼센트를 점령함으로써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의 포위 전략에 말려 일순간에 참혹한 패배를 겪었고, 이는 독일을 2차 세계대전의 패망국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승리를 눈앞에 두었다고 자신했지만 앗! 하는 순간 참혹한 실패로 전락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한국현대사는 고비마다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결정적 돌파구를 열어 온 역사였다. 이승만 정권을 끌어내린 1960년 ‘4월혁명’,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재촉한 1979년 ‘부마항쟁’, 군사정권에 최후의 철퇴를 내린 1987년 ‘6월민주항쟁’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민항쟁으로 일구어낸 승리 역사가 순탄하게 지속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도리어 뒤를 이은 것은 승리의 환호가 아닌 탄식과 절망의 한숨소리였다. 이 모두가 바로 개인의 이익을 앞세운 정치권의 탐욕이 빚어낸 음습한 아래와 어두운 뒤 켠 이었다.


4월혁명과 함께 이전 시기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일시에 집권 여당이 되었다. 하지만 신파와 구파로 갈리면서 혼란스런 정쟁을 반복했다. 결국 1년 뒤 5.16군사쿠데타가 단행되면서 피로 얻은 민주주의는 침몰하고 말았다. 박정희 정권 몰락 이후에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이른바 ‘3김씨’는 저마다 권력에 손에 쥔 듯이 의기양양하며 제 갈 길을 갔다. 그 결과는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의 권력 찬탈이었다. 절망의 어둠을 헤치고 민주화투쟁의 불꽃을 당긴 것은 광주 시민들의 피의 항쟁이었다.


1987년의 경험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당시 국민 절대다수의 염원이었던 민주화의 고리는 바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 직선제로 김대중과 김영삼, 이른바 ‘양김씨’ 중 한 명을 대통령으로 세우면 민주화는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게 민주화는 단순하고도 명료한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직선제 개헌 이후 양김씨가 5년을 참지 못해 서로 먼저 대통령이 되겠다고 갈라서면서 어렵게 얻은 승리를 군부 출신에게 헌납하고 말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제3당 위치에 있던 김영삼은 그 상태에서는 집권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 보수 성향의 정당과 손잡고 ‘3당합당’을 전격 추진했다. 그 결과로 새누리당으로 이어진 보수정당 우위의 뒤틀린 정치지형이 지속되었다.


만약 1987년 이후 양김씨가 분열되지 않고 함께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민주정당의 절대 우위가 장기간 유지되면서 한국 사회와 남북 관계 모든 점에서 전혀 다른 양상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반세기에 이르는 기나긴 굴절의 시기를 거친 뒤 어렵사리 3당합당의 후과를 청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새누리당의 기반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4.13총선을 거치며 새누리당을 떠받친 양대 동맹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TKPK지역동맹에서 PK가 이탈하기 시작했고, 5060세대동맹에서 50대가 이탈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정세에 따라 입장을 바꾸어 왔던 수도권 전략 선택 층도 등을 돌렸다. 그러던 차에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의 거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지면서 새누리당을 일거에 초토화시킬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새누리당의 지지율은 추락했고, 비박 세력의 동요와 이탈로 당이 언제 쪼개질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이 지속되어 왔다.


문재인과 민주당은 새누리당의 참패와 자신들의 승리는 한 쌍을 이루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과연 그럴까?


촛불시민혁명의 쓰나미는 낡은 정치 질서를 강타하면서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그 양상은 많은 사람들의 상상을 비웃으며 의외의 방향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조만간 정치권은 연대와 통합을 통한 새판 짜기에 골몰할 가능성이 높다.(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회에 다룰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의 포로가 되어 기존 틀 안에 갇혀 있다가는 졸지에 주변부로 내몰릴 공산이 대단히 크다. 그 점에서 문재인과 민주당은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다.


지난 11월 23일 김무성이 대선 불출마와 박근혜 탄핵 추진 등의 입장을 표명했다. 다음 날 이를 다룬 <한겨레>, <중앙일보>, <조선일보>의 기사 기조가 사뭇 달랐다. 대척점에 선 것은 <한겨레>와 <조선일보>였다. <한겨레>는 김무성이 친박 청산을 통한 당의 혁신에 무게를 둘 것으로 보았다. 반면 <조선일보>는 탄핵 추진이 새누리당을 친박당과 신보수당으로 쪼개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았다. <중앙일보>는 중간 입장에서 김무성이 당 안팎을 넘나들며 정개개편을 이끌 것이라 예측하였다.


각 신문의 기조는 은연중에 주관적 희망 사항을 반영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된다. 촛불집회에서 가장 자주 외쳐졌던 구호는 박근혜 퇴진과 함께 새누리당 해체였다. 새누리당 해체의 가장 현실적인 모습은 당이 두 개 혹은 그 이상으로 쪼개지는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새누리당의 해체에 가장 적극적인 기사를 내보낸 것은 <한겨례>가 아니라 <조선일보>이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그 배경에는 각 매체가 그리고 있는 향후 정치 지도의 차이가 도사리고 있다. <조선일보>는 일관되게 친박과의 결별을 전제로 제3지대를 무대로 한 보수의 재구성(신보수연합)을 추구하고 있다. 그럴 때만이 보수 중심의 권력을 재창출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한겨레>는 어떤가? <한겨레>의 논조는 문재인 진영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문재인과 민주당 지도부는 촛불민심이 폭발한 이후 상당 기간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기존 3자 구도가 유지될 때 집권 가능성이 가장 크며, 새누리당이 붕괴되어 양자 구도로 가면 불리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촛불시민항쟁은 문재인과 민주당 지도부가 선호하는 구도를 뒤흔들어 놓을 요소였다. 실제 비박과 국민의당이 연대 가능성을 내비치자 민주당 지도부는 이성을 잃은 채 극도의 신경과민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추미애 대표의 반복되는 실언은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권의 거대한 지각변동이 예고되는 시기에 문재인과 민주당은 여전히 기존 틀에 갇힌 채 보수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기득권에서 벗어나 정치권 새판 짜기에 주도적으로 나설 안목도 의지도 모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면 민심의 흐름에서 유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칫 친박과 친문세력이 동반 몰락하는 운명에 처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어쩌면 진영 논리를 바탕으로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해온 두 세력은 차제에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일반 논리의 귀결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촛불시민항쟁을 실질적인 정치적 승리로 이어가기에는 전반적인 상황이 너무나도 불안하다. 각자 정치적 이해관계를 계산하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역사의 잔혹함에서는 눈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나 …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 … ’라는 탄식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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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은/ 새사연 연구원





‘사회영향평가’의 시작과 발전 과정


개인이나 단체, 기업 활동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유의미한지 평가하게 된 지는 30여 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 시작은 미국 정부가 1960년대 말부터 공공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그 효과를 검증하기 위해 기준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사회영향평가(SIA, Social Impact Assessment)는 환경부문 이외에도 1990년대부터는 사회 영역으로까지 폭넓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사회영향평가(SIA)는 인프라 프로젝트나 개발 정책의 사회적 효과를 검증하는 방법론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기존에는 계획된 정책 위주로 적용되어 왔으나, 지금은 활용 영역이 확장되어 계획되지 않은 재난, 인구 변화, 전염병 등의 사회적 영향을 평가하는데도 사용하고 있다. 국제영향평가협회(IAIA)에 따르면, 사회영향평가는 정책, 프로그램, 프로젝트 추진과 이로 인한 사회적 변화 과정을 의도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사회 결과를 분석하고 모니터링하고 감독하는 과정이다. 공공정책, 환경이나 교육정책, 정부나 국제구호나 비영리기관이 수행하는 국제 개발 프로젝트 등 모든 분야가 사회영향평가의 대상에 포함된다.


공공 부문에서 시작된 ‘사회영향평가(SIA)’가 전 영역으로 확산하게 된 주된 흐름이 있다. 맥킨지&컴퍼니가 소개한 자료를 간단히 보자(McKinsey & Company).


1964년 미국 존슨 행정부가 ‘빈곤과의 전쟁’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효과성을 평가하는 기준을 마련했다. 이후 1969년에 미국 환경 정책 법안이 통과되면서 연방 정부에 이에 대한 효과 측정을 요구하게 되었고, 환경 영향 평가 보고서에 처음으로 ‘사회영향평가’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다. 이는 1974년에 환경 분야뿐 아니라 사회정책 및 프로그램으로까지 적용되었고, 1983년 미국 정부가 영향 평가를 공식화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986년 세계은행이 사회영향평가 항목을 넣으면서 각국으로 알려지게 된다.


1990년에 로버츠 기업 개발 재단(REDF)이 소외 계층에게 고용 기회를 주는 사회적 기업에 직접 투자하면서, 1996년에 이 활동의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는 ‘사회적 투자수익률(SROI, Social return on investment)’ 분석 방법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사회영향평가의 토대가 실질적으로 마련되었고, 지금까지도 각 영역에 맞는 평가 모델들이 제안되면서 보완되고 있다. 사회적 투자수익률(SROI)은 REDF가 개발한 이후 영국의 비영리 연구조직인 신경제재단(NEF, New Economic Foundation)이 개선해 나가고 있으며, 유럽 SROI 네트워크가 국제 표준화에 힘쓰며 유럽을 넘어 아시아 지역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사회영향평가를 활용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사회 변화의 원인, 예측되는 긍정 혹은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이해, 부정적 영향 완화 방안, 지역사회의 사업 참여, 사회 갈등 예방과 조정 등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런 강점에도 몇 가지 한계들이 제기된다. 사회영향평가 방법의 이론적 토대가 부족한 것에 따른 적용의 문제. 특정 집단의 이익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될 위험. 평가 필요성에 대한 정부의 관점 부족. 최종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위상 등은 풀어야할 쟁점들이다(이정환, 2004). 게다가 평가를 위한 측정이라는 한계와 측정할 수 없는 부문까지 평가 대상으로 삼는 방식에 대해 논란의 여지도 남아 있다.

 



활동의 사회적 가치를 밝혀내는 ‘사회적 투자수익률(SROI)’


사회적 영향을 ‘평가’한다는 말에는 계량화된 ‘측정’의 의미와 주관적인 ‘평가’의 의미가 혼합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영향평가의 방법도 ‘규칙 기반 접근법’(rule-based approach)과 ‘원리 기반 접근법’(principle-based approach)으로 나뉜다. ‘규칙’은 말 그대로 객관적 측정에 가깝게 설계되는 매뉴얼처럼, 정교화되고 계량 분석이 가능하도록 지표와 대상을 정의하고 규칙을 정해 조직 활동의 성과를 측정한다. 반면에 ‘원리’는 주관적 평가에 근접한 방식으로 참여자들이 합의한 원리에 기초해 사회적 성과를 목표로 한 모든 활동의 사회적 편익을 측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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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