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컷 경제] 92년 경기침체 이후 16년만에 최악의 사태에 빠진 미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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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발표한 미국의 소비자신뢰지수(컨퍼런스 보드)가 지난달 58.1에서 50.4로 또 다시 큰 폭으로 하락하였다. 이는 시장 예측치인 56에 비해서도 크게 하락한 수치다. 현재의 생활 형편을 반영하는 지수는 74.2에서 64.5로 떨어졌고, 향후 경기를 예고하는 경기지수는 47.3에서 41로 하락하였다.



미국의 소비자신뢰지수는 올 1월부터 6개월 연속 하락하고 있다. 지난 해 7월 정점(111.9)을 기록한 이후 일시적으로 반등한 12월(87.8→90.6)을 제외하면, 거의 1년 동안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셈이다.
6월에 기록한 수치는 지난 경기침체기(2002~2003년)의 61.4(2003년 3월)보다도 11p 낮은 수치로, 1992년 2월 이후 16년 만에 최악의 경제 상태를 보이고 있다.

특히 구직 상황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데, “구직이 어렵다”고 응답한 비율이 지난달 28.3%에서 30.5%로 상승한 반면, “수월하다(plentiful)”고 응답한 비율은 16.1%에서 14.1로 하락하였다. 향후 6개월 후 구직 전망에 대해서도,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9%에서 8%로 하락하였고, 더 줄어들 것이라는 응답은 32.3%에서 35.5%로 증가하였다. 구직 상황과 전망에 대한 어려움은 지난 5월 급격한 실업률(5.1→5.5%) 상승에도 잘 나타나있고, 7월 3일(현지시각) 발표하는 미국의 6월 고용지표는 더욱 하락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향후 6개월 후 소득이 늘어날 것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14.1%에서 12.3%로 줄었고, 자동차, 주택, 가전제품, 여행 등 가계소비에 대한 전망도 모두 하락하였다.
이는 미국 GDP의 70%를 차지하는 소비가 향후 더욱 침체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최근 유가가 급등하여 휘발유 가격이 갤런(1갤런=3.785ℓ)당 4달러를 넘어서고, 신용경색과 금융시장 불안으로 소비자들의 대출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또한 어제 발표한 미국의 대표적인 주택가격지표인 Case-Shiller 지수는 전년 동기대비 15.3%나 하락하였다.

현재 주택시장, 고용시장, 금융시장 등 어느 곳 하나 미국 소비자들의 생활과 전망에 우호적이지 않다. 특히 문제의 근원인 주택시장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기 때문에 이 침체와 나락의 끝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90년대 초 미국 캘리포니아의 주택시장침체, 90년대 일본의 장기경기침체 등은 향후 미국경제를 예측하기 위한 경험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30년 만에 다시 등장한 ‘고유가’,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온 ‘양극화’, 전대미문의 ‘무역과 금융의 자유화’라는 새로운 변수들이 추가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아무튼 미국경제의 추락을 강 건너 불구경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국경제도 영원한 우방(?)이라고 칭송하는 미국경제만큼 심각하기 때문이다.

소비자신뢰지수 조사는 사업(business), 고용, 소득 세 가지 지표에 대한 설문조사(5,000가구의 샘플 중 통상 3,500개 응답)를 통해 진행된다. 각각의 설문에 대하여 세 가지 기준(통상 좋음, 나쁨, 보통)의 응답을 통하여 상대적 평균치(1985=100)를 구하는데, 이는 소비자들이 느끼는 체감경기 지표로 활용되고 있다. 통계청이 매월 발표하는 소비자기대지수와 한국은행이 분기별로 발표하는 소비자심리지수가 이에 대응하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수가 100이하면 사업, 소득, 고용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응답하는 비율이 높고 지수가 낮을수록 현재의 생활 형편과 경기 전망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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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실린 박정호 기자님의 글입니다.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해 켜졌던 촛불이 장맛비에도 꺼지지 않고 있다. 되레 불씨는 곳곳에 닿았다. 촛불문화제에서 거리행진으로, 쇠고기 문제에서 언론 문제, 대운하 문제로 그리고 정권 퇴진 운동으로 불꽃이 옮겨 붙는 양상이다.

그냥 촛불이 아니라 삼단 같은 불길이다. 촛불문화제에서 들리는 시민들의 구호와 시민들의 피켓은 분노 그 자체다. "이명박 물러가라!"는 말은 점잖은 축에 속할 정도다.

그런데

이상하게 답답하다. 힘이 빠진다. 수많은 밤을 촛불과 함께 지새웠지만 세상은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미국 쇠고기 재협상은 아직도 요원하고 정부의 낙하산 인사는 착착 진행되고 있다. 국민과 소통하겠다던 이명박 대통령은 한자릿수로 떨어진 지지율에도 요지부동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촛불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어떻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그 길의 실마리를 <주권혁명>(손석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장 지음, 시대의 창 펴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혁명의 사전적 의미는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이다. 좀 과격한가. 그만큼 현재 세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손석춘 원장은 "21세기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수탈과 야만적인 제국주의를 넘기 위해서는 민중이 직접 정치하고 직접 경영하는 즐거운 혁명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손 원장은 우선 프랑스 단두대에서 시작된 핏빛 혁명부터 시작해 근대 민주주의 탄생까지 톺아본다. 민중의 나라 건설을 부르짖었던 소련과 동유럽 실존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도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실존사회주의의 공백을 인정머리 없는 신자유주의가 메웠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기득권세력의 정의 그대로 '자본이 누리는 절대적 자유'다. 더 간추리면 '자본독재'다. … 신자유주의의 중심에는 민주주의 탄생기의 시민도, 성숙기의 노동자도 없다. 주변으로 밀려나 있다. 시민과 노동자를 대체한 중심에는 사람이 자리하고 있지 않다. 자본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혁명이다. 국민이 아닌 자본에 봉사하는 국가를 이대로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손 원장은 "경제주권과 정치주권을 비롯해 모든 권력의 주권을 민중이 주체가 되어 행사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 주권운동"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정치주권? 지금도 우리 손으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지 않나'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선출로 끝이 아니다. 탄핵하고 감시할 권리까지 필요하다. 민중을 위한 헌법개정도 이루어져야 한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국민 건강권과 관련된 미국 쇠고기 수입이나 한반도 대운하 등 중요 정책도 국민이 직접 결정해야 옳다.

"아래로부터 강력히 통제되는 정치구조를 지닐 때 정치는 비로소 참여의 대상을 넘어 정치 자체가 민중의 창조물이 된다... 신자유주의 자본독재를 넘어서려면 자본의 논리를 통제해야 하며 그 방법은 법과 제도에 근거해야 한다."

손 원장은 인터넷을 통해 직접 소통이 가능해진 지금 중요 정책에 대한 국민투표와 대통령, 국회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에 대한 국민소환 그리고 국민이 직접 정책을 제안하는 국민발안권을 정치주권 행사의 방법으로 제시했다.

경제주권은 어떨까. 손 원장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신자유주의라는 말로 포장된 '자본독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물론 과거 개발독재 시대의 국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턱대고 민영화나 노동 유연성을 최고가치로 받드는 것도 아니다. 대신 시민과 노동자들의 보호자가 되라는 것.

"국민과 국민경제를 보호하고 육성지원하는 기구가 될 때, 국가는 비로소 지배기구라는 낡은 틀을 벗을 수 있다. 미래를 내다보고 산업정책을 수립하는 일, 외국 투기자본으로부터 국부를 보호하고 금융을 공공화하여 생산력 발전의 동맥으로 활용하는 일, 노동의 창조성을 최대한 고취할 수 있는 기업 구조를 유도하는 일을 비롯해 민주경제 체제를 건설하는 데 국가의 기능은 실로 크다."

또한 손 원장은 북한과의 경제협력도 주목했다. 그는 "통일민족경제 건설이라는 전략적 목표 아래 남과 북이 빠른 속도로 경제협력을 발전시켜야 한다"면서 "이는 신자유주의를 벗어난 민주 경제 체제 건설에 새로운 활로"라고 밝혔다.

민중을 위한 사회가 그려진다. 이제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어 보자. 손 원장은 '주권운동 3단계'를 책 말미에 썼다. '국민주권운동 준비위원회 출범'과 주권혁명의 이상을 담은 새로운 헌법 만들기 운동 그리고 선거혁명이다. 즉 민중이 깨어나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 또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바꾸려는 열정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시인해야 옳다. 민중의 다수가 역사적 현실에 침묵하거나 외면할 때 역사는 반드시 보복하기 마련이다."

그래서다. 숨 막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민중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든 것이다. 지긋지긋한 장맛비에도 서슬 퍼런 공권력에도 촛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주권혁명>을 이룰 때까지 해야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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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촛불에 나타난 1인미디어 발전방향"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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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언론인권센터(이사장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 안병찬 ) 1인미디어특별위원회"는 미 쇠고기 문제로 촉발된 촛불정국에서 ‘웹2.0시대 새로운 형태의 시민저널리스트’로 맹활약하고 있는 1인미디어에 주목하여 이들의 역할과 의미를 분석하고 바람직한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언론인권포럼을 개최합니다. 특히, 1인미디어가 취재 현장에서 겪는..

    2008/06/24 17:14

4인 가족인 우리 집에는 매월 네 통의 핸드폰 요금 청구서가 날아온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핸드폰을 하나씩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 때는 물론 직장 초년 시절까지도 당시 유행하던 삐삐조차 쓰지 않았던 나로서는 아직 어린 애들에게 핸드폰이 뭔 필요냐고 반대를 했었다. 하지만 맞벌이 부부에 둘 다 저녁 귀가 시간마저 일정하지 않아 아이들을 챙겨줄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핸드폰은 필수라는 아내의 강력한 주장에 끝까지 맞설 명분이 궁색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집은 일인당 핸드폰 하나씩을 갖춘 가정이 되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한마디로 격세지감이다. 처음 집에 TV가 생긴 것이 초등학교 2학년 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배트맨, 요괴인간 등 만화영화를 보기 위해 저녁마다 동생과 함께 이웃집으로 달려가던 수고와 그 댁 아주머니의 눈총을 면할 수 있었다. 전화가 놓인 것은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TV보다 후순위였던 것은 분명하다. 둘 중 무엇을 먼저 들여놓아야 할 것인지를 두고 가족이 상당히 심각하게 토론을 했었다. 당시 부모님은 전화가 더 필요하셨던 것 같으나 나와 동생의 애절한 요구에 못 이겨 결국 TV를 택하셨다.

봉이 김선달은 공공재를 팔아먹지 않았다

가정마다

TV 한 대, 전화기 한 대씩이 놓인 지가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니건만 지금은 이들 가전제품이 없는 생활은 상상하기가 어렵울 정도가 되었다. 방송과 정보통신은 이미 개별 가정의 선호나 수익자 부담 원칙을 넘어서는 공공재가 돼버린 것이다.

공공재라는 것은 이를 대체할 다른 수단이 없다는 점이 주요한 특징이다. 고기가 부족하면 생선을 먹으면 되지만 직장에 있는 부모가 아이들 소재를 확인할 때 핸드폰 대신 전보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내 개인사를 통해 반추해 보았듯이 공공재는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고 시대와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집집마다 전화가 한 대씩 놓일 때는 유선 통신망이 공공재가 되고 전 국민이 한 대씩 핸드폰을 보유하고 있는 시대에는 모바일 통신 인프라가 공공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공공재에는 시장 가격을 부여하기도 어렵고 시장 기구에 전적으로 공급을 맡길 수 없는 사정이 있다.

만일 이 특성을 거꾸로 적용하여 특정 개인이나 기업이 공공재에 해당하는 영역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영리에 활용할 경우 그(기업)는 무소불위의 독점력과 함께 엄청난 폭리를 거의 무한정 취득할 수 있게 된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을 팔았다지만 그는 사실 강물을 길어다 먹는 백성들로부터 물값을 받아낸 것이 아니라, 돈으로 권세 부리던 한양 허풍선이라는 양반 한 사람을 속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공공재의 사적 영리화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일방적 갈취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봉이 김선달의 행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문제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민영화를 ‘사적 갈취’라고 표현한 것이 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설마 공공재를 통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개인이나 기업이 치부하도록 놔두기야 하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확히 그렇다. 공기업의 선진화니 효율성 증진이니 하는 것은 표면적인 수사에 불과하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정치권력의 수준이 국민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세계적 재벌의 치부 비결은 공기업 사유화

‘사적 갈취’의 대표적인 사례가 멕시코의 통신 재벌 카를로스 슬림(Carlos Slim)이다. 올해는 순위에서 밀렸지만 그는 지난해 빌게이츠나 워렌 버핏을 제치고 세계 최고 갑부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다. 국제 경제의 변방인 멕시코에서 부동산 회사를 운영하던 그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를 모은 비결은 다름 아닌 공공재의 사유화였다.

그는 정권과의 유착을 통해 1990년 멕시코 국영 통신회사를 인수했다. 1,100여개의 공기업을 200개로 줄인 멕시코 신자유주의 정권 살리나스 정부의 민영화를 이용한 것이다. 슬림의 국영 통신회사 인수가는 18억 달러였으나 지난해 그가 보유한 민영 통신회사의 주가 평가액은 자그마치 360억 달러에 달했다.

17년 만에 20배로 불어난 재산이 ‘민영화를 통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경영’ 덕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민영화 이후 멕시코의 전화요금은 대폭 인상되었다. 한 멕시코 대학교수는 민영화 이후 전화요금이 지역과 사용자에 따라 최고 5,000배까지 인상되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것이 ‘갈취’가 아니고 무엇인가.

누구나 즉각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공공재인 물, 전기, 전화에 비해 체감이 다소 떨어지는 탓인지 은행 사적 소유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는 아직 많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다소 과해 보이는 우리 가족의 핸드폰 보유량이 일인당 한 대인 데 비해, 지난해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가구당 보유 금융상품(보험, 예적금, 펀드 등)은 평균 8개가 넘는다. 우리나라 가구의 평균 구성원을 3인으로 잡으면 일인당 2.5개 이상인 셈이다.

가구당 8개씩 보유하고 있는 금융상품

한집에 자동차를 두 대 가지고 있는 경우는 있어도 한 사람이 두 대씩 가진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어쩌면 금융상품은 개인들이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상품 중 하나일 수 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이 이처럼 금융에 노출되었으며, 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기도 하다. 국민 생활에서 금융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을 혹자는 선진국형 진화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러현 변화는 우리 국민들이 금융 강국을 만들겠다는 정부 구호에 혹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국민 복지 체제가 제대로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노후나 혹시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 대한 대비를 민간 금융상품인 생명보험이나 상해보험 등으로 대비하는 실정이다. 해마다 치솟는 부동산값에 어떻게든 내집 하나라도 마련하려는 서민들이 은행 대출을 통해 집을 산다. 그보다 사정이 못한 경우에는 전세자금 대출이라도 받아야 수도권에 몸 하나 뉘일 공간을 마련한다. 월급 받은 돈 은행에 넣어봤자 실질금리가 형편없으니 저축 수단이 되지 않아 펀드에 가입한다.

국가와 사회가 보장해야 할 국민들의 최소 생활과 복지를 마련하지 않는 조건에서 어쩔 수 없이 금융 의존도가 대폭 높아진 것이 외환위기 이후 십여년 간 가속화된 현상이다. 이런 판에 우리나라 대부분의 민간 은행 소유권은 이미 외국인 손에 넘어가 있다. 소유가 바뀌고 나서 나타난 정책이 각종 수수료 인상, 은행 직원의 대량 해고, 기업 대출 중단과 부동산 거품을 부채질한 주택담보 대출 급증, 담보 없는 서민들의 대부업체 이용 폭증 등이다. 이 결과로 은행을 소유한 외국인 주주들은 막대한 순이익을 거두고 있다.

한해 은행권 전체의 순이익이 10조 원을 상회하고 국민은행 하나가 올리는 수익은 현대자동차의 순이익과 맞먹는 규모다. 그리고 그 이익의 대부분은 해외로 빠져 나간다. 이를 두고 강정원 국민은행장조차도 “자산의 99.9%가 국내에 있고 수익도 99.9%가 국내에서 나오고 지점도 4개를 제외한 모든 점포가 국내에 있는 상황에서 외국인 주주 비율이 80%를 넘는 것은 이상한 소유구조”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외환위기 이전 10년 동안 국내 시중은행들의 수익은 다 합해 7조 원 수준이었다. 한해 평균 7,000억 원이니 지금 국민은행 혼자서 올리는 수익의 1/3도 채 안 되는 규모다. 이것이 무엇을 뜻할까. 사실상 공기관이었던 은행들에게 중요한 것은 돈벌이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국민경제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공급하는 은행 본연의 기능에 충실했을 뿐 효율과 수익성을 명목으로 국민 개개인에게서 돈을 짜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경제에 필요한 ‘공공기관’을 돈벌이 사업에 투입시켜 놓고 ‘돈을 이만큼 벌었네’ 하고 자랑하는 게 신자유주의자들의 유치한 셈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은행 소유하면 대한민국 경제를 갖는다

지나간 공기업 민영화의 과정이 이렇게 명백한데 이명박 정부는 몇 개 남지 않은 국책 금융기관 중 하나인 산업은행 민영화에 몸이 달아있다. 알다시피 산업은행은 일반 시중은행과 성격이 또 다르다. 산업은행법 제1조는 설립 목적을 “중요 산업자금의 공급·관리”로 천명하고 있다. 한국경제의 발전을 가져온 전력ㆍ철강 등 기반산업과 중화학 자동차 전자 반도체 등 대표 산업의 설비ㆍ운영 정책자금을 저리로 제공하면서 산업구조 고도화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것이 산업은행이다. 이제 이것마저 떼어서 팔아넘기겠다는 것이다.

2008년 3월 말 현재 산업은행의 총자산은 145조 원으로 삼성그룹(144조 원), 국민은행(233조 원) 보다는 적지만 수신(예금액)이나 부채를 제외한 실질적인 총자산 측면에서 산업은행은 ‘대한민국 1위’다. 그런 점에서 “산업은행을 집어삼키는 자본이 한국 경제를 움직이게 된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만한 규모의 자산을 인수할 자금 여력이 국내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산업은행 주인이 누가 되리라는 것쯤은 불을 보듯 뻔하다. 외국 자본 또는 몇몇 국내 재벌들의 연합일 것이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의 국민 건강에 대한 악영향이 10년쯤 후부터 표출된다면, 산업은행 민영화로 인한 국민경제의 위험은 10년 후면 이미 치유 불가능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대한민국 그리고 우리 가정의 10년 후를 위해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까닭이다.

정희용 / 새사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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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끝내 100만의 촛불이 바다를 이루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기에 이를 해석하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출되고 있다. 보수 신문조차 대의민주주의의 위기가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것을 보면 이는 이념지향을 떠난 공통의 인식인 듯하다. 직접민주제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라는 의견도 있고 새 시대 문화혁명의 시작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해석은 서로 다른 ‘촛불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도 아고라와 광장을 통해 촛불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지식인들의 논쟁 자체를 관념화시키고 있다. 촛불은 현재도 ‘진행형’이기에 단정적인 평가는 성급하다. 미래를 논하기 전에 촛불 정국이 만들고 있는 과거와의 단절점의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한다.

왜 20대도 30대도 아닌 10대였을까

촛불정국을

관통하는 커다란 전환과 단절은 바로 지난 10년간 누적된 진보진영의 패배주의가 극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초기 촛불정국의 주인공인 중고생의 동력이 무엇인가 복기해 보자.

조중동이 말하는 천박한 배후론은 열외로 해도 다양한 의견이 제출되었다. 가장 크게 공감을 얻은 의견은 이명박식 교육개혁에 대한 중고생의 분노가 표출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영어 몰입교육이니 0교시 수업이니 하는 속칭 교육자율화 조치로 인해 쌓인 분노가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터져 나왔다는 주장이다. ‘미친소 미친교육’이라는 구호가 나오는 것을 보면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불만의 크기로야 어디 중고생뿐이랴. 1,000만 원 등록금에 88만 원 세대요, 청년백수 준비생인 대학생들의 고통이 중고생 보다 작지 않을 것이다.

또 일부에서는 세대론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이른바 386세대의 자식들 세대가 바로 현재의 중고생들이며, 386세대의 비판적 사회의식이 자식들의 교육에 투영된 결과 현재의 20대와는 다른 사회비판적 의식의 10대가 형성되었다는 논리다. 이른바 386세대 계승론이다. 386세대가 이전 세대와 구별되는 뚜렷한 세대적 공감과 특성이 존재하기에 일견 설득력 있는 주장이긴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벌이지고 있는 커다란 흐름을 설명하기엔 너무도 단편적 분석이다.

사실 사회현상을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우매한 것이기는 하다. 모든 사회현상은 늘 종합적인 작용에 의해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대론적 측면에서 중고생들이 여타 세대와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현재 중고생들은 정치적 패배와 좌절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라는 점이다.

진보진영의 깊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촛불의 힘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386세대 전반에 개혁진영 패배라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분열과 실패는 진보를 바라는 국민들에게 진보정치의 좌절이라는 깊은 트라우마를 만들어냈다. 그 뿐인가. 한총련 운동의 실패는 현재의 20대들과 대학생들에게 진보적 운동 자체에 대한 깊은 불신의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러한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는 한 신자유주의 모순이 아무리 깊어져가도 이들이 행동에 나서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재의 10대들은 이런 좌절과 패배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로지 옳고 그름의 구별이 존재하며 이러한 인식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전환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정치적 경험의 차이가 바로 청소년들을 즉각적 행동전으로 나서게 만든 주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중고생의 진출은 각계각층의 진출로 이어졌다. 20대 대학생들이 동맹휴업을 결의해내며 거리에서 주축을 이루기 시작했고 30~40대 넥타이 부대들이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녀노소 구별 없이 100만의 촛불이 물결을 이루며 지난 10년간 반복된 좌절과 분열, 패배의 상처를 씻어낸 것이다. 결국 중고생들의 진출은 곧 10대의 순수함으로 기성세대의 트라우마를 치유해낸 과정이었다.

촛불을 중심으로 복원돼가는 국민의 연대의식

촛불 정국을 관통하는 또 다른 단절은 고립과 개별화를 넘어서 국민적 연대의식이 복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산 쇠고기 운송을 거부하겠다는 화물연대의 선언에 네티즌들이 환호 했다. 촛불싸움에 가세한 금속노조의 홈페이지에는 지지 방문이 쇄도 했고 총파업을 준비하는 민주노총에도 국민들은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 있다.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국민들에게 지지 받기는 정말 오랜만’이라며 어색하게 웃는 노동운동가들의 얼굴에서 그들이 겪은 ‘고립의 고통’이라는 또 다른 트라우마를 읽을 수 있었다. 농번기라 농민들의 대규모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강기갑 의원에 연호하는 국민들의 지지는 곧 농민에게 보내는 강한 연대의식의 발로로 봐도 무방하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고립화 현상은 정부당국과 보수언론, 자본이 지난 10여 년간 끈질기고도 악의적으로 이들을 계급이기주의로 몰아붙인 결과다. 수입개방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투쟁을 두고 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농민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었다.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노사간의 갈등을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이기적 행동으로 매도하는 조중동을 향해서조차 침묵의 동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제 노동자 농민들의 고립은 끝나가고 있다. 90%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촛불행진을 통해 노동자, 농민은 함께 같은 길을 가는 ‘동료’라는 강한 연대의식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충격 후 스트레스 장애라 불리우는 트라우마는 정신적 장애다. 증세로는 늘 불안해하면서 주위를 살피는 과민반응을 보이며 사건이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 항상 주저하는 등의 비정상적 감정상태와 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지난 10년간 반복된 진보개혁진영의 패배주의 역시 트라우마 증세와 비슷한 양태를 보인다. 교류를 거부하는 고립운동, 과민반응의 일종으로 이해되는 과격한 운동, 비정상적 감정으로 이해되는 낙후한 문화정서 등이 그것이다.

이런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신적 충격을 대체할 수 있는 적절한 감정 재경험을 통해서 치유되는 것이 유력하다고 한다. 촛불의 대행진은 진보진영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감정 재경험의 장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패배와 좌절, 분열과 고립의 상처를 씻어내고 있는 촛불정국은 이제 전혀 다른 진보운동이 출현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 내고 있다.

끝으로 안타까운 일은 트라우마의 피해자는 적절한 감정의 재경험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지만 정작 트라우마를 만들어낸 가해자는 감정의 재경험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국민들의 가슴에 정치개혁의 실패라는 깊은 상처를 남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퇴진은 안 된다고 했으니 말이다. 또 대선 패배의 상처를 국민들에게 안긴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는 쇠고기 문제에 어정쩡 끼어들긴 했으나 한미FTA를 빨리 추진해야 한다고 반복 주장하고 있다. 이들 모두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스스로 감동하며 등장한 정치세력이다. 그러나 이제는 감정의 재경험으로는 치료가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촛불이 아무리 늘어도 이들을 치료하기는 어렵다. 차라리 의학의 힘을 빌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하다.

김문주 / 새사연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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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서울경기지부)>(회장 정달현 | 새사연 운영위원)에서
제작한 뮤직비디오입니다.

흥겨운 힙합리듬 속에 치의료정책에 대한 치과의사들의 건강한 고민이 담겨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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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이 ‘시대착오’의 낡은 이미지로 덧칠해 대량 유포한 말이다. 부정적 인상을 주기 십상이지만, 바로 그래서다. 이 글에서 나는 운동권이란 말을 일부러 쓴다.

 ‘운동권’과 촛불을 든 시민의 소통을 소망해서다. 촛불은 신선하고 운동권은 고리타분하다는 담론이 곰비임비 펴져있다. 운동권과 촛불세대를 가르기도 한다. 과연 그래도 좋은가. 기존의 진보세력을 싸잡아 신자유주의에 투항했다는 왜곡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그런 ‘386’도 있다. 하지만 묻고 싶다. ‘참여정부’와 국회에서 활동한 386들이 과연 진보세력인가. 아니다. 기존의 모든 진보세력이 신자유주의에 저항하지 않은 듯이 이야기 하기는 사실과도 다른 매도다.


 ‘광우병 쇠고기’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며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교육운동을 줄기차게 벌여온 사람들이 있다. 나는 노동현장, 농민현장, 빈민현장, 교육현장에서 변함없이 꿋꿋하게 활동하고 있는 ‘아름다운 386들’을 알고 있다. 정치권에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있다.

 왜 그들 모두를 촛불을 든 시민과 굳이 단절시키려 하는가. 그런 담론을 펴나가는 지식인의 글과 말을 마주칠 때마다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아름다운 386과 촛불세대를 누가 단절시키고 있는가


 2002년

효순-미선의 원혼을 위로하며 밝힌 촛불 때도 그랬다. 줄곧 운동해 온 사람들에 대한 불신은 촛불의 분열로 이어졌다. 친미사대 언론의 틀(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그 결과는 촛불의 몰락이었다.

 오해 없기 바란다. 진보운동을 해온 사람들이 지금 촛불 집회를 ‘지도’해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진보세력은 실제로 그것을 지도할 역량을 갖출 만큼 준비하지도 유연하지도 못한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분단체제를 극복하려고 온 생애를 바쳐온 사람들과 촛불을 들고 나선 사람들 사이에 단절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없는 단절을 굳이 단절시키려는 담론은 더 큰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


 그렇다. 지금은 ‘운동권’으로 매도 당해온 진정한 진보세력과 촛불세대 사이에 다리를 놓을 때다. 그러려면 진보세력과 촛불을 든 시민 모두 성찰이 필요하다.

 먼저 진보세력이다. 그동안 진보세력은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넘어설, 실현가능한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는 데 스스로 소홀했다.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로 고통 받고 있는 민중의 가슴에 다가서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자기 안의 경직된 신념을 다지거나 ‘뺄셈’을 하며 분열하는 데 많은 시간과 힘을 소모한 탓이 아닐까.


 촛불을 든 시민들도, 10대 청소년들도 성찰해볼 물음이 있다. 혹 진보세력에게 선입견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 선입견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꼭 짚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상당수에게 그 선입견의 기원은 저 부라퀴 언론이다. 촛불을 든 시민은 순수하고, 운동권은 불순하다는 도식은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 논객들 사이에서도 엿보인다. 과연 그런 도식이 옳은 것인가. 성찰이 절실한 까닭이다.


 먼저 진보세력이 시민에게 ‘낮은 목소리’로 다가서라


 그렇다. 촛불을 들고 만나야 한다. ‘운동권’과 촛불을 든 시민 사이에 단절을 강조하는 수구세력의 불순한 의도에 대해선 굳이 거론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진보논객들이 그런 담론을 펴는 일은 옳지 못하다.

 그래서다. 촛불 아래로 진보세력이 먼저 시민에게 다가서길 제안한다. 다가설 때 간곡히 당부하고 싶다. 어깨에 힘을 뺄 것을,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해 갈 것을. 촛불 아래서 민주시민도 ‘운동권’에 다가서길 제안한다. 다가설 때 정중히 당부하고 싶다. 선입견을 벗어나길, 이야기를 경청하고 판단하길.


 ‘운동권’과 시민이 마음을 열고 소통할 때, 바로 그 때가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넘어설 주권혁명의 출발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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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적인 쇠고기 수입 협상으로 촉발된 촛불 정국이 한 달여 지속 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의 요구는 쇠고기 재협상에서 국민 주권 전반에 대한 요구로 발전하고 있다. 역사가 보여주는 바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는 강단이나 국회, 헌법재판소에서 성장하지 않았다. 촛불 정국에서 입증되듯이 국민의 주권의식과 민주주의 역량은 대개 거리에서 발생하고 성장해간다. 그런데 2008년 5, 6월을 관통하는 촛불 정국은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에 대한 국민의 안목을 높이는 계기로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여느 때보다 경제 이슈가 빈번히 등장하고 기지가 반짝인 촛불 정국의 경제학을 살펴보자.


18원의 비용과 유쾌, 상쾌한 효용


먼저 재치와

풍자가 넘치는 ‘18원 후원’하기다. 후원 대상은 한나라당의 심재철 의원. ‘광우병 쇠고기로 스테이크를 해먹어도 안전하다’는 발언이 네티즌의 공분을 자극했다.


항의 및 조롱의 뜻으로 심재철 의원에게 1원 또는 어감이 좋지 않은 18원을 정치자금으로 보내자는 의견이 나오고 네티즌의 반응은 신속했다. 게시판에는 1원이나 18원을 보낸 송금 내역이 갈무리 사진과 함께 연이어 올라왔다. 그런데 아무리 분노를 표시하는 일이라지만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18원도 쌓이다 보면 심 의원에게 경제적 이익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한쪽에서 제기되었다. 경제적 효과에 갈등이 생기는 순간이다.


그러자 이 문제에 대한 기상천외한 해법이 역시 네티즌 사이에서 속출했다. 18원을 보내고 정치후원금 영수증 교부를 등기속달로 요구하자는 안도 그 가운데 하나다. 영수증 등기속달 발송 비용은 1,750원. 만일 대통령 탄핵에 서명한 130만 명이 모두 18원을 보낸다고 할 때, 의원 통장에 2,340만 원이라는 거액이 쌓이지만 영수증 교부를 위해 심 의원은 22억 7,500만 원을 지출해야 한다. 보내는 사람은 18원의 비용으로 유쾌, 상쾌, 통쾌한 편익을 얻고 심 의원측은 수입의 백곱절 비용을 지출하므로 경제적으로 큰 손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제안의 실현성 여부를 떠나서 18원 후원을 둘러싼 아기자기한 논쟁은 경제학에서 다루는 ‘효용’ 개념을 설명하는 사례로 교과서에 실려도 손색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사용가치’가 객관적 개념인데 비해 ‘효용가치’는 주관적이다. 평균재산이 35억 5,000만 원인 사상 최대의 부자 내각이나 지난 한 해 동안 부동산에서만 13억 원 이상 재산을 불린 자산가 심재철 의원에게 18원의 사용가치는 미미할 따름이다. 그러나 18원으로 후원자들이 누리는 효용은 결코 적지 않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한 개인의 정신건강을 위해 18원 정도의 비용을 지불하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 상당히 탁월한 경제적 선택이다.


수돗물 괴담과 민영화


다음으로 수돗물값 하루 14만 원론이다. 한 네티즌이 우리가 하루 사용하는 물의 양을 약 258리터로 계산했다. 이를 시중에서 파는 생수값 리터당 5백 원으로 환산하면 약 14만 원이다. 아주 간단한 아이디어지만 그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물론 과장되었다. 그러나 공공재인 수돗물을 이윤 추구가 우선인 사기업에 맡길 경우 벌어질 수도 있는 최악의 사태에 대한 경고라고 읽으면 이걸 괴담이니 뭐니 하면서 호들갑 떨 이유가 없다. 그러나 정부와 언론은 이를 즉각 괴담으로 몰아붙일 뿐 정작 본질인 물 사업 민영화의 위험성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 합리적 설명을 좀처럼 내놓지 않는다.


수도 민영화 후 첫 4년 동안 물값이 매년 50%씩 상승한 영국이나 미국 기업 벡텔사가 물 공급권을 넘겨받은 뒤 수도요금이 최고 200%까지 오른 볼리비아, 민영화 이후 2년 만에 요금이 600% 인상되고 1,000만 명에게 수돗물 공급 중단 사태를 가져온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언론에 노출된 해외 사례들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는다.


정부가 정책이 아닌 셈법 차원으로 이 문제를 취급한다면, 좋다. 산수를 해보자. 정부의 ‘물산업 육성 5개년 세부 추진 계획’에 따르면 “현재 11조 원 정도인 국내 물산업 규모를 오는 2015년까지 20조 원 이상으로 키우고, 세계 10위권에 드는 기업을 2개 이상 육성한다”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보자. 지금 정부든 민간이든 물 아껴쓰기 캠페인이 한창이다. 물을 ‘물 쓰듯’하던 시대는 지났고 일인당 물 소비량은 점차 감소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인당 물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데 우리나라 인구가 불과 7년 사이에 갑자기 배로 늘어날 것도 아닌 이상 물 산업 규모를 두 배로 키우는 방법이 무엇일까? 지름길은 물값 인상밖에 없지 않은가. 괴담의 근원은 결국 정부가 아닌가?


국민은 경제정책을 논했는데 정부는 산수가 틀렸다며 괴담이라는 말만 한다. 쇠고기 사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국민이 생명권과 검역주권, 경제주권을 이야기하는데 정부는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좋다고 밖에 나갔다가 벼락을 맞을 확률보다 적다’고 과학적이지도 않은 통계나 읊어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참으로 두루 소통부재의 정부다.


대통령이 궁금해 한 촛불값


“1만 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며 화를 냈다는 대통령의 귀국 일성은 국민들을 여러 가지로 허탈하게 했다. 그토록 촛불을 들어도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닫힌 대통령에 대한 좌절이 가장 먼저다. 부수적으로는 그래도 대기업 CEO를 지내 통이라도 클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라는 실망감도 안겨주었다.


경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또 산수 차원으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 ‘경제 대통령’이 자꾸 그렇게 만든다. 가게에서 한 개 1,000원 하는 초로 계산을 해보자. 촛불문화제가 시작된 5월 2일부터 대통령이 중국에서 돌아온 5월 31일까지 모두 30번의 집회가 있었다. 집회 참가자 수에 대해 주최측과 경찰의 추산이 매번 다르지만 정부가 산수만큼은 자신있어 하는 것 같으므로 경찰 집계를 기준 삼으면, 집회 참가자는 항상 1만 명 이하다. 그럼 최대 1만 명의 시민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촛불을 들었다고 해도 30회 X 1만 명 X 1,000원 = 3억 원이다. 이 3억 원의 출처가 그렇게도 궁금했을까.


아무리 경기가 어렵다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는 세계 13위 경제대국 아닌가. 평범한 서민들일지라도 자신의 의사 표현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지갑에서 1,000원 한 장 꺼내들 용의는 있다. 나도 함께 간 내 딸도 청계광장의 모금함에 촛불값을 냈다. 어떤 거대한 배후로부터 1,000원짜리 초를 받은 게 결코 아니다.


CEO출신 대통령과 장관의 경로 의존성


구태와 시대착오적인 시스템이 고쳐지지 않고 관성적으로 진행되는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이라고 한다. 이미 한번 익숙해진 시스템에 안주하기 때문에 잘못이 드러나도 개선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으며 똑같은 과오가 되풀이된다. 이번 사태를 두고 정운천 장관이나 이명박 대통령이나 똑같이 “국민 눈높이가 그렇게 높은 줄 미처 몰랐다”는 말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정 책임자가 국민 눈높이를 모른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이 바로 대통령과 현 정부의 경로 의존성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건설사와 정체가 아리송한 금융회사 사장 출신이고 정 장관은 농업 기업가로 이름을 알린 사람이다. CEO 시절에 가장 중요한 것은 수치로 환산되는 거래 이익이다. 이를 위한 약간의 편법과 위험 감수는 기업가적 모험심이라고 칭송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형성된 시스템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서도 경로 의존성에 의해 동일하게 국정에 적용된다는 게 문제다. 광우병은 ‘약간의 위험’일 뿐이고 정 불안하면 안 사먹으면 그만 아니냐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래서 국민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운하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도 수돗물 민영화도 산업은행 민영화도 다 추진되는 것이다.


앞으로 다른 문제가 또 터지면 돌아올 대답은 뻔하다. “국민이 그렇게 눈높이가 높았어?” 경로 의존성이니까.


촛불 정국에서 귀먹은 정부에 국민은 기어코 ‘대통령 하야, 탄핵’ 구호를 꺼내들었다.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들이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을 그토록 가벼이 여긴다면 대한민국의 권력이 누구로부터 나오는지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제의 앞날을 이야기하자는데 자꾸 조그만 거래 이익과 셈법에 집착하는 경로 의존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 또한 국민들이 직접 나서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촛불 정국은 그렇게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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