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시위가 새로운 논란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가두시위의 불법성, 폭력성 논쟁이 그것이다. 보수언론은 일제히 ‘촛불시위 변질’, ‘정부의 안일한 대응’, ‘평화시위 한다더니 거리의 무법자, 시민들 분통’ 등의 기사를 쏟아내면서 그나마 평화적이었던 촛불시위가 불법과 폭력으로 ‘변질’되었다고 야단이다.


경찰청장은 ‘배후’ 운운하면서 엄정한 사법처리를 고장 난 라디오처럼 되풀이하고 있고, 인터넷에서도 ‘빨갱이’ 운운하는 낯익은 문장들이 공세를 시작했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평화로웠던 의견표명’이 가두로 나오면서 실정법을 명백히 위반했고, 이것은 전문 운동권의 배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공권력에 저항했기 때문에 ‘폭력’시위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촛불시위는 ‘거리로 나섰기 때문에’ 민주적 정당성을 상실했다는 것이 이들이 하고픈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과연 국민의 의사표명이 ‘합법’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면 민주적 정당성이 사라지는 것일까?


위법으로 저항할 정당한 국민의 권리 ’저항권’


합법이라

정당하고, 불법이라 부당한 것이 아니다. 불법이라도 민주적 정당성이 부여되는 저항이 있다. 바로 저항권이다.


법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저항권을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통치권자나 국가권력 소유자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하여 다른 모든 합법적인 보호수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그러한 보호수단을 행사하더라도 실효성을 예견할 수 없는 경우에 공개적으로 복종을 거부하거나(소극적 저항) 실력을 행사하여(적극적 저항) 저항하는 권리(또는 의무)로 정의하고 있다.


정상적인 민주국가에서는 기본권의 보장과 다양한 견제기구, 법률을 통해 국민의사를 전달한다. 이런 경우에는 저항권을 행사할 상황 자체가 없다. 법률적 수단을 통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저항은 저항권의 행사라기보다 정상적인 정치활동이다.


그러나 이런 합법적인 수단이 없거나, 실효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는 위법적인 저항이 민주적 정당성을 얻는다. 즉 저항권의 핵심은 권력자에 대한 ‘불법적인’, 즉 실정법에 얽매이지 않는 항거에 있다.


어떤 사회에서는 위법한 행동이 다른 사회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개연성은 항상 존재한다. ‘법의 불합리성’을 제기하는 저항, 시민불복종운동의 경우 새로운 입법행위를 촉구하는 정신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운동의 성공으로 특정 법이 폐기된다면 위법성의 문제는 사후 정당화된다. ‘독약은 약이 아니라 독일뿐’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법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악법은 부지기수다.


물론 모든 위법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학자들은 대부분 권력자의 불법행위에 대한 저항권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권력자의 ‘합법적인 권력’ 행위는 저항권 행사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다.


대개 권력자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법률을 만들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또한 정상적인 ‘정치활동’도 불법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이 모든 과정에 걸쳐 특정한 정치적 이념을 상식으로, 즉 지배이데올로기로 확고히 해 이외의 주장에 대해서는 원천적으로 불법화할 수도 있다. 때문에 통치 권력의 ‘합법.불법’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매우 모호하다. 특히 권력의 독재가 심화될수록 이런 심판의 기준을 제시하는 사법부가 국민의 편에 선 적은 거의 없다. 


촛불문화제가 정치구호를 남발했기 때문에 일몰 이후 명백한 시위이며 불법이라 주장하던 정부가 가두시위가 확산되고 있는 28일에는 "촛불문화제는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폭넓게 인정하되 불법 가두시위는 법질서 확립을 위해 엄단한다"는 대응원칙을 결정한 것은 권력자들의 자의대로 합법과 불법을 규정할 수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저항권 행사 대상을 국가권력 소유자의 ‘불법적인 행위’로 제한시키는 것은 매우 소극적인 해석이다. 예를 들어 유신헌법은 국민투표라는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통과됐다. 또한, 체육관에서 대통령이 허락한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대통령을 뽑았던 것도 외형상 합법이다. 그렇다면 이 때문에 독재시절 이뤄진 모든 민주화 시위의 정당성이 사라진다고 할 수 있을까?


따라서 국민 저항권의 두 번째 핵심은 단순한 합법과 불법의 여부가 아니라 권력자가 국민의 의사와 명백히 다른 정치행위를 자행할 때, 주권을 가진 국민이 이를 통제하기 위한 권리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가깝게는 2004년 합법적인 대통령 탄핵을 자행한 국회에 대한 국민저항을 저항권의 한 사례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헌법과 저항권의 정당성


이처럼 국민의사와 괴리된 권력자에 대한 비합법적 저항을 의미하는 저항권은 흔히 법에 명확히 명시되어 있는 실정법으로 보장되기보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자연법으로 인정되어 있다. 따라서 실정헌법상 저항권이 규정되어 있다하더라도 이는 단지 자연법적 저항권을 확인하는 성격을 가진다.


우리 헌법의 경우, 6월항쟁의 영향으로 인해 저항권 명시가 쟁점이 된 바 있으나, 저항권을 직접 명시하지 않고 헌법 전문에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구를 추가함으로써 저항권규정을 대신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또한 제37조 1항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는 조항도 자연권으로서의 저항권을 인정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리고 헌법 제1조에서는 국가의 주권이 명백히 국민에게 있음을 표명했으므로, 주권자의 주권행사를 가로막는 것은 명백한 위헌이다. 헌법 자체가 추상적인 문구이기 때문에 해석하기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6월항쟁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현행 헌법이 국가운영의 주체를 선출된 권력자보다 국민에게 있음을 표명한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산 쇠고기 협상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통치행위이며 합헌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의사표현과 정치활동을 가로막는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이다. 정치활동을 가로막는 행위는 단순히 가두시위 참여자를 연행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권력을 동원하여 인터넷 감시, 여론 조작, 배후 운운하는 공포감 조성 등의 활동이 모두 포함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법률적으로 합법적인 정치활동 또한 국민 저항권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하지만, 주권자인 국민의 정치활동을 가로막는 명백한 위헌 행위는 이견 없는 국민 저항권의 대상이다.


따라서 정부와 공안당국이 저항의 위법성을 들이대면서 민주적 정당성을 운운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미천해 나타나는 반응일 뿐이다. 헌법에 명시된 4.19 민주이념이 이승만 정권이 허용한 시위의 현장에서 절대 도로로 내려오지 않아 만들어진 정신은 아니지 않는가? 저항권을 불순한 배후세력의 의도적 도발 정도로 인식하는 편협한 사고로는 민주주의가 형상화된 촛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와 공안경찰은 국민의 저항이 단순히 ‘아스팔트로 올라섰기 때문에’ 불법이며, 이 때문에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뜻보다 미국과의 협상파기를 더 두려워하는 통치자의 행위가 주권재민의 원칙에 비추어 위헌적이지 않은 지 고민해볼 일이다.

저항이 싫다면 국민의 참여를 합법화해야


물론 국민의 저항권이 일상화되면 국가적인 혼란도 일상화된다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국민저항을 막는 방법은 저항행위에 대한 ‘협박’이 아니라 ‘저항의 합법화’, 즉 지금의 저항을 정상적인 정치활동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국민이 청원을 하고, 서명을 하고, 촛불을 들고 모여도 어떤 의견도 권력자에게 강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저항의 강도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기초적인 상식이다. 만일 정권이 제시한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국민의 의사가 수렴되고 관철될 수 있는 합법적 경로가 있었다면, 과연 가두시위가 호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이런 의미에서 지금의 가두시위를 만든 것은 정권의 경직된 사고방식과 더불어 국민으로부터 정치를 빼앗아간 직업 정치꾼들이다. 이들은 국민을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는 실체로 보기보다는 법적 지위가 평등한, 동일한 국적보유자 전체에 불과한 것으로만 간주한다.


따라서 국민 개인의 의견은 국가운영에 직접 반영할 수 없으며, 오로지 국민 전체를 대표하도록 선출된 국회의원 등에게만 국가운영의 권리를 보장한다. 권력자를 제어할 최소한의 장치도 국회에만 있으며,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할 권한도 국회 내에만 머물러 있다. 국민이 정치에 개입할 최소한의 통로인 국민투표나 국회의원과 대통령 소환, 국민발안 등은 전혀 없다.


물론 국민의사의 직접투입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직접민주주의 기제가 과거 독재정권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오용되기도 했다. 나찌도 합법적으로 집권했으며, 유신헌법은 국민투표로 합리화 됐다.


그러나 국민의 오판을 비판할 정도로 국회의원들이 정당하고 용감한 정치 활동을 해왔다고 자부할 수 없을뿐더러, 민주적 정보공유와 국민 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차단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형식화된 국민투표의 문제를 국민의 정치참여를 가로막는 논리로 사용할 수는 없다. 국민의 의사가 왜곡될 수 있다면 왜곡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국가운영의 주체로서 국민의 역할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또한, 국민의 합법적인 정치활동을 가로막는 것은 각종 제도의 부재에만 있지 않다. 유형의 장벽 이외에도 온갖 추잡한 정치활동으로 국민이 정치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만드는 무형의 냉소주의도 국민의 정치참여를 박탈한다. 그리고 촛불시위처럼 역동적인 국민의 정치활동을 불법 운운하며 차단하려는 공안당국의 시도도 같은 효과를 의도한다.


정말 정권이 가두시위를 막고 싶다면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줘야 한다. 정치를 더러운 것, 짜증나는 것, 쳐다보기도 싫은 것으로 만들어 자신들만 소유하려 하지 말고, 누구나 참여하는 것, 나의 일상 문제와 관련된 것,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거리로 나가 교통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손가락질 하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아니라 국민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는가? 왜 지금 경찰과 조중동만이 가두시위를 불편해 하는가? 시민들은 불편해하지 않는다. 다만 불편한 것이 있다면 지난 대선에서 자신들이 찍은 투표용지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아닐까.

손우정 roots9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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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날의 느낌

    Tracked from -_-'s me2DAY  삭제

    불법시위? 국민에게는 '저항권'이 있거든.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통치권자나 국가권력 소유자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하여"이라는 내용과 "단순한 합법과 불법의 여부가 아니라 권력자가 국민의 의사와 명백히 다른 정치행위를 자행할 때"가 핵심. 잘 모르는 내용. 공부해야지.

    2008/06/02 18:22
  2. 해피씨커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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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고르군에게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들(1 , 2) 을 잘 정리해놓은 글 from 한날군me2day

    2008/06/02 19:06
  3. 해피씨커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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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고르군에게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들(1 , 2) 을 잘 정리해놓은 포스팅 (from 한날군me2day)

    2008/06/02 19:07


  난 당연히 될 줄 알았다. 창조한국당이 적어도 정당이라면 그것도 스스로를 진보적이라 생각하는 정당이라면 당원들이 문국현 대표의 제명을 결의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창조한국당은 너무도 조용하다. 개별 당원들의 탈당은 줄을 잇고 있지만 문 대표를 상대로 한 조직적 대항은 전무하다. 문 대표가 자신하듯 80%의 당원들이 선진당과의 야합을 지지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내가 아는 창조한국당의 당원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80년대 군부에 함께 항거했던 많은 나의 지인들이 사람중심경제에 환호하며 창조한국당의 발기인이 되었다. 90년대 통일 운동에 헌신하던 많은 후배들 역시 기꺼이 당원이 되어 대선을 치렀다. 그들은 한결같이 한나라당을 혐오하며, 스스로 새로운 유형의 유연한 진보정당을 만드는 개척자라는 자부심에 차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민주당과의 결합조차도 야합이라 여기던 사람들이기에 차떼기 원조인 이회창과의 결합은 상상하기 힘든 치욕이었을 것이다.

 

  문국현의 정치는 '장사치 정치'임을 입증한 사건

 

  그럼에도 창조한국당은 너무도 조용하기만 하다. 혹시나 문 대표에 대한 환상과 기대의 찌꺼기가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문 대표는 창조적 진보는커녕 수구적 반통일관을 지닌 사람이다. 대선 시기 NLL을 오히려 북쪽으로 올리고 북쪽은 이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반북적대 의식을 노골적으로 표방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환경운동을 정치에 이용했으나 기실 녹색생태정치와도 인연이 없는 사람이다. 정동영 당시 대통령 후보가 20% 유류세 인하를 공약하자 이에 질세라 30% 인하를 주장하던 반환경론자다. 이런 문 대표의 문제점을 너그럽게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중심 진짜경제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서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희망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통해 문 대표는 자신의 정치가 신의에 기초한 광폭의 국가경영 정치가 아니라 얄팍하게 손익을 계산하는 장사치 정치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원내교섭단체로 떨어질 부스러기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지지해준 지지자들의 믿음에 배신의 칼을 꽂지 않았는가? 더 이상 무슨 논쟁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가 말하듯 선진당도 창조적 진보가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과학의 힘을 빌려 콩을 심고 팥이 나길 기대하는 것이 좋을 일이다.

 

  부에만 마음이 쏠려있는 상인이 통치자가 될 때 파멸이 온다는 플라톤의 말이 새삼 절실하게 다가온다. 경제 대통령을 표방한 CEO 이명박의 통치가 시작되자 대한민국의 정치는 곧바로 파멸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상인은 공직에 적합하지 않으며 그들의 미숙한 손으로 꾸며진 정략은 정치를 파멸 시킨다는 플라톤의 말은 창조한국당에 더더욱 절실할지 모른다. CEO 문국현의 미숙한 정략은 바로 이 순간 창조한국당을 파멸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할 진데 문 대표에게 대항하는 당원들의 조직적 행동이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창조한국당이 그의 사당이었음을 역으로 입증하는 꼴이다. 이는 한국 진보정치의 발전에 참으로 안타까운 걸림돌이다. 지난 대선 시기 창조한국당의 출현은 '문국현' 개인의 성과가 아니라 한국 진보개혁운동의 역사적 산물이며 귀한 자산이다. 그들이 문 대표를 통해 한국정치에 제기한 주제는 반신자유주의라는 의제였다. 이는 10년 전부터 진보진영에서 선도적으로 제기한 의제였다. 그러나 정작 전통적인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구시대적 관념성에 더해 분열에 빠져 반신자유주의 의제의 주인공이 되지 못할 때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경제를 공론화 시킨 공로는 창조한국당에 있다. 비록 당은 다르지만 민주노동당이나 창조한국당이나 그 뿌리가 상통함을 의미한다.

 

  문국현에 대한 제명을 결의해야 한다

 

  게다가 창조한국당을 만들어낸 수만 명의 개미군단들은 난데없이 등장한 사람들이 아니다. 멀게는 80~90년대 한국의 진보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이며 가깝게는 유시민의 개혁당에 열광했고 노무현의 희망돼지에 열광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모여 이명박을 상대로 진보정치의 희망을 만들고자 열정을 바쳐 헌신적으로 만든 당이 바로 창조한국당인 것이다.

 

  플라톤이 경멸한 상인 정치인 '문국현'은 그냥 개인일 뿐이다. 그는 창조한국당의 개미 당원들만큼 투쟁해온 역사도 없고 그들만큼의 역사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기에 그는 스쳐지나가는 정치인일 뿐이다. 그러나 창조한국당을 만든 당원들의 진보적 진정성은 살아남아야 한다. 마치 개혁당을 만들어 열린우리당에 팔아먹은 유시민의 사기행각을 떠올리게 하는 이 같은 행위를 그저 지켜볼 수는 없다. 따라서 길은 하나다. 창조한국당을 살리는 평당원의 직접행동만이 유일한 답이다. 그들이 모여 진보를 사칭한 문 대표의 제명을 결의해야 한다. 그것이 창조한국당의 진실이 사는 길이자 문 대표에게 지지를 보낸 국민의 배신감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길이다.
 

  김문주/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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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창조한국당을 탈당합니다

    Tracked from FLY TO THE MOON | 정치를 탐(探)하다  삭제

    선거 기간 대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 블로그를 시작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또 힘들게 선거 기간동안 문국현 후보와 동행하며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글을 올리며 블로그를 운영했습니다. 비록,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였지만 '인간 문국현'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했었기에, 보람된 시간이였다고 생각했습니다. 80일 간의 동행이 끝나고, 문국현 후보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습니다. 기대보다 낮은 지지율에 실망했습니다. 함께 고생했던 선거캠프분들과도, 지지..

    2008/05/28 16:39
  2. 문국현과 이회창의 악수(握手)는 악수(惡手)이다

    Tracked from 오선지위의 딱정벌레  삭제

    작년 대선 후보로 나왔을때 문국현은 누구인가?라는 의문으로 포스팅을 작성한 적이 있다. 그 이후 대선이 끝나고 더 의문이 들었다. 대선 후 심각한 내분을 격고 있을때 창조한국당은 1인정당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많이 들었다. 이번 선진당과의 공조를 보면서 문국현은 구멍가게 사장님이라는 생각에 동조를 하고 공감한다. 대통령병에 걸린 이회창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않다. 그가 말하던 '대의(?)'가 누구를 위한 대의란 말인가? 쿼바디스, 창조한국당 이란..

    2008/05/29 09:25

학교 안 스타벅스와 학교 밖 민영화

새로운 시선 2008/05/28 09:55 Posted by 미디어팀



대학 내 공간은 줄고 상업시설은 넘쳐나는데


지난 26일 이화여대 총학생회 부회장과 간호대 학생회장이 학교 앞 8.5m 높이 철골 구조물에서 고공시위를 벌였다. 생산직 노동자들의 고공 크레인 농성을 방불케 하는  시위를 대학생들이 벌인 이유는 ‘이화 캠퍼스 콤플렉스 빌딩 상업화 반대’, ‘등록금 동결’이라고 한다.(한국일보 2008년 5월 26일자)


이대는 올해 초 약 일만 평 규모의 이화 캠퍼스 콤플렉스를 완공했다. 그런데 새 건물의 알짜배기 공간은 모두 스타벅스나 씨네큐브와 같은 외부업체에 임대되었다. 더군다나 학교는 이들 업체와의 계약 내역이나 수익금 사용계획을 전혀 공개하지 않았고, 올해도 어김없이 등록금을 올렸다.


홍익대의 경우도 지난해 말 16층 규모의 빌딩이 완공되었는데 고급 레스토랑 등 상업적 시설이 입점하기로 계약을 한 상태이고, 서강대도 2010년 대형 할인점 홈플러스가 입점하기로 최근 계약을 맺었다. “대학이 임대해 준 빌딩의 규모와 프리미엄 등을 감안하면 연간 임대수입이 30억~50억 원에 달할 것”이라는 추정이 나올 만큼 대학은 큰 이익을 얻게 된다.


‘대학 자율화’가 아니라 ‘대학 기업화’ 

웬만한 대학들은 학교 정문만 나서도 주위에 숱한 편의점이나 음식점, 쇼핑시설이 차고 넘치는 것이 현실인데 굳이 대학 안으로까지 이런 시설을 끌어들여야만 하는지 의문이다. 그러나 백보를 양보해서 학내에 이런 시설을 들인다고 한다면 그만큼 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이 줄어들거나 혹은 교육환경이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대학은 엄연히 ‘비영리 법인’이고 상업시설을 유치해서 ‘수익’을 냈다면 그것은 학교운영을 위해 반드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학의 등록금 부담이 줄어들거나 교육환경이 호전되고 있다는 말은 들려오지 않는다. 상업시설의 학내 진출만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대학의 이런 변화는 2000년 이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정부를 비롯한 일각에서는 이를 ‘대학 자율화’라고 부른다. 상식적인 의미에서 ‘자율화’란 조직 외부의 압력에 상관없이 조직 구성원의 내부적 요구대로 조직이 운영되는 것을 말한다. 정부 통제 하에 있던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대학 자율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 운영에 있어서 내부 구성원의 결정이 반영되고 있는가? 학생과 교수의 요구나 결정은 배제되고, 학교재단의 이익을 위한 결정만이 배타적으로 관철되는 것이 대학의 모습이다. 학교재단의 배타적 결정행위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정부의 조정과 통제기능 마저 자율화라는 명목으로 거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대학은 기업의 운영 행태와 기업의 논리구조로 수익을 좇아 작동한다. 따라서 지금 대학의 모습은 ‘자율화’라기 보다는 ‘영리화’, ‘상업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혹은 ‘시장화’, ‘기업화’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이것이 바로 대학의 신자유주의화 

이미 현재의 대학은 교육‘기관’ 보다는 교육‘회사’에 가깝다. ‘기관’은 ‘공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곳을 뜻한다. 즉 젊은이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다양한 기초적 소양을 쌓는 공익적 기관이 예전 대학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은 교육 서비스라는 상품을 제공하고 그 댓가로 수익을 창출하는 상품 공급자이다. 대학생의 처지 역시 ‘학문적 욕구나 자질’이 아니라 자신이 ‘지불하는 비용의 크기’에 따라 교육 서비스 상품을 구매하는 수요자로 변했다. 대학은 수익을 남기는 기업이며, 교육 산업은 수익성 높은 신흥 성장산업이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최근 대학 재단들이 펀드 투자를 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학생들의 등록금을 걷어 마련한 자금을 종자돈 삼아 펀드투자를 하고, 아예 금융적 자산운용으로 분야를 확대하는 것이다. 하긴 우리나라의 유명한 사모펀드인 장하성 펀드의 주요 자금원이 바로 미국 버지니아 대학과 조지타운 대학 재단이니 우리 대학들은 선진국 대학의 추세를 따라가는 것이라 변명할 수도 있겠다.


이 정도에 이르면 단순히 대학의 ‘시장화’나 ‘기업화’ 수준을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세계적 경쟁력을 갖는 대학’, ‘대학의 국제 경쟁력 강화’라고 부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확한 표현은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다. 대학과 대학생에게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캠퍼스 안의 잔디밭이 하나둘씩 상업용 건물로 바뀌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장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학 시장화 = 은행 기업화 = 공기업 민영화 

그렇다면 ‘시장화’된 대학에서 학생들이 처지가 어떻게 변했는가? 등록금이 내리고 좋은 교육환경이 확대되었는가? 아니다. 매년 오르는 등록금이 천만원에 이르렀다. 대학이  시장화의 수순을 밟는 순간 등록금은 바로 교육 서비스 상품을 구매하기 위한 ‘서비스 비용(charge)’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다.


비슷한 예로 은행을 들 수 있다. 외환위기 전까지 은행은 ‘금융기관’이었다. 과거 은행들은 수익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다수 국민들의 저축을 받아 이를 기업들에게 대출하는 ‘자금 중개기능’을 수행하는 공적 기관이었다. 때문에 은행은 사회적으로 엄격히 관리되었고 대체로 사적 기업에 의해 소유되기 보다는 공적인 소유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은행은 금융기관에서 ‘금융회사’로 급격히 변신했다. 은행은 돈이 안되는 서민들의 소액 예금을 꺼렸으며, 위험부담이 큰 중소기업의 대출도 꺼렸다. 대신 확실하게 돈이 되는 (그러나 국민경제에는 큰 부담을 주는) 개인 신용대출과 주택담보대출을 무리할 정도로 확대했다. 덕분에 엄청난 신용 대란과 연이은 부동산 대란이 발생했지만 은행이 챙기는 수익은 높아만 갔다. 어느새 시중은행들의 총 수익이 13조원을 넘어섰고 대형은행의 수익이 대형 자동차기업 수익과 맞먹는 규모로 커졌다. 이제 은행장들이 나서서 자신들을 금융기관이 아닌 금융회사로 불러달라고 주장한다.


공기업의 민영화는 반드시 요금 인상 유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공기업이나 공공재에 대한 민영화 역시 같은 맥락이다. 민영화는 나라의 구성원이 공유해야 할 공공적 자산, 공공적 서비스를 특정 기업에 팔아서 사유화시키는 과정이다. 대학과 은행이 그런 것처럼 공적 성격을 없애고 사적 성격의 회사로로 전환시킨다는 것이다. 민영화는 결국 사유화다. 신자유주의다.


공기업의 사유화(민영화)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물론 서비스의 질이 올라갈 수도 있다. 그것이 기업에게 더 많은 수익을 보장해 준다면 말이다. 대신 그 서비스는 아무나 쉽게 이용할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높은 비용대가를 지불해야 할테니 말이다.


‘글로벌 인플레이션’ 시대, ‘고물가 저성장’의 시련이 다가오고 있다. 새 정부가 전방위적으로 추진하려는 민영화는 그렇지 않아도 물가폭등에 걱정이 많은 우리 국민들에게 각종 요금인상과 비용인상의 위협을 가져올 것이 뻔하다. 민영화에 따라 의료보험료 인상, 수돗물 가격 인상, 고속도로 주행료 인상 등의 ‘괴담’이 단지 ‘괴담’에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김병권 |한국사회의 진보적 대안을 찾아가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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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산업을 새로운 국가 성장동력 산업으로 육성할 것이다.”

지난 3월 22일 세계 물의 날 기념식에서 한승수 국무총리가 한 발언이다. 최근 환경부도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물 전문기업을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미래 핵심 산업 전략으로서 ‘금융’ 성장 엔진론을 넘어 이제 물산업 성장 동력론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이명박 정부 경제 정책의 핵심인 ‘민영화’가 깔려 있다. 오는 5월 22일 환경부가 상수도사업 민영화를 골자로 하는 ‘물산업지원법’을 입법 예고하려는 것도 민영화 정책의 연장선인 것이다.


물 사용비 하루 14만원?


환경부까지 나서서 해명을 할 정도로 급속히 확산된 이른바 ‘수돗물 괴담(?)’이 최근 화제가 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산수 문제를 한번 풀어보자. 하루에 한 사람이 평균 사용하는 물의 양이 285리터란다. 마시고, 씻고, 빨래하는 데 사용하는 물의 양을 모두 합산한 양이다. 현재 수도 요금이 1톤당 577.3원이니까 이 물을 수돗물로 사용하면 현재는 약 170원 정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을 시중에서 판매하는 생수(1리터 당 약 500원)로 충당한다고 가정하면 얼마나 들어갈까.


정답은 약 14만 원이다. 상수도가 민영화되면 수돗물 값이 생수 값과 맞먹는 수준으로 폭등할 것이고 결국 하루 14만 원이라는 엄청난 물 값을 내야 하는 때가 올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상당히 과장된 산수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민영화, 정확히 표현하면 ‘사유화’는 비용 상승을 유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교육, 의료, 공공 서비스와 같은 서비스 부문의 민영화 논리는 주로 ‘서비스의 질을 높인다’는 것이다. 수도 민영화도 마찬가지다. 민영화를 통해 비용도 절감하고 질 좋은 수돗물 공급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공적으로 소유되고 운영될 때보다 서비스의 질이 높아질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바로 비용이다.


민영화하면 서비스가 나아진다? 그러나 비용대가는 반드시 뒤따른다


어떤 서비스든 그것이 사적 기업에 의해 소유되고 제공되면 당연히 ‘서비스 제일주의 원칙’이 아닌 ‘수익실현 원칙’이 적용되기 마련이다.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것도 어디까지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서이며, 따라서 향상되는 서비스 수준만큼의 비용을 소비자에게 요구하게 된다. 비용을 많이 지불하면서 고급 서비스를 받을 의향이 있는 일부 상위 계층에게는 이전에 비해 훨씬 질 높은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다. 그러나 중산층을 포함해 대개의 경우는 별다른 서비스의 향상 없이 그저 훨씬 높아진 비용만 지불할 가능성이 높다. 한발 더 나아가 이른바 수익성(?)이 없는 지방이나 농촌은 아예 서비스 자체를 받을 기회가 없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실제로 상수도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정부는 “2005년 11조 원 정도인 국내 물 산업 규모를 오는 2015년까지 20조 원 이상으로 키우고 세계 10위권에 드는 기업을 2개 이상 육성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2007년 7월 ‘물 산업 육성 5개년 세부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올 1월 ‘물산업지원법’ 안을 제정하고 최근 수정을 거쳐 5월 22일 입법 예고할 계획이다.

물 산업 육성 5개년 세부 추진계획 개요

 

■ 현재 약 11조 원(2005년) 규모인 물 산업을 2015년까지 그 두 배인 20조 원 규모로 육성하고, 세계 10위권 기업 2개소를 육성

■ 서비스업 구조 개편 추진(광역화 및 공사화 또는 민영화), 시설투자 및 제도개선, 기술력 등 경쟁력 제고, 해외시장 진출, 연관 산업 육성

■ 물은 더 이상 공공재가 아닌 경제재이며, 상하수도는 공공서비스가 아닌 산업적 서비스로 규정

■ 상하수도 공급의 주체는 국가나 지방정부가 아닌 전문 기업이며, 향후 국가와 지방정부의 기능을 관리 및 감독기능에 한정

■ 물 산업 육성 제도화를 위해 물산업지원법 제정

 

* 출처 : 물 사유화 저지 사회공공성 강화 공동행동, “물산업지원법 비판 정책워크샵”, 2008.1


민간위탁경영 확대를 발판으로 기업화 거쳐 결국은 외국기업에게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물산업지원법’은 9조 1항에서 “지방 자체단체는 상하수도 사업을 효율적으로 운영, 관리하기 위해 지방 공기업법 3장과 4장의 규정에 따라 법인을 설립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어 4장에서는 “단독 또는 연합으로 지방자체단체 외의 자(외국인 및 외국 법인을 포함한다)와 공동 출자해 상법에 의한 주식회사를 설립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수도 사업의 민간위탁경영 -> 주식회사법인 설립과 운영(기업화) -> 물 사업에 외국인 참여 허용 등의 경로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최근까지도 물은 ‘필수재’이면서 ‘무한재’였다. 거의 비용 없이 주위에서 무한히 가져다 쓸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당연히 물을 가지고 돈을 벌수 없었다. 그러나 도시화가 진행되고, 환경오염이 심해지면서 물은 무한재가 아니라 ‘값 비싼 유한재’로 변해갔다. 식용 생수가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기 시작했고, 이를 상품화하여 수익을 실현하는 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은 이제 대단히 유력한 수익실현 대상이 된 것이다. 이처럼 매력적인 비즈니스 대상이 된 물을 정부가 여전히 독점하고 있는 상황을 주주자본주의가 반길 리 없다.


물, 전기, 가스는 수익실현 대상이 아니라 엄연한 ‘공공재’


그런데 물은 ‘공공재’이기도 하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빠짐없이 향유해야 하고 골고루 소비해야 하는 사회적 서비스 대상이라는 것이다. 재산의 유무나 학력의 유무, 거주지의 차이에 관계없이 물은 모든 사회구성원이 공평하게 소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어떠한 대한민국 국민도 돈이 없다는 이유로, 또는 학력이 낮거나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물을 마시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물 산업이 민영화, 사유화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공급되는 물의 안정성이 높아지거나 물의 중간 유실률이 줄어드는 등 서비스가 좋아지는 지역이 생길 수는 있다. 그러나 당연히 그만큼의 비용이 더 지불되어야 한다. 경제적 능력에 따라 수돗물이라는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의 격차가 발생하게 되며, 그 순간 물은 더 이상 평등한 접근권과 사용권이 보장된 공공재가 아니다.


정부는 5월말부터 6월까지 물산업지원법 제정을 포함해 공기업 구조조정과 민영화 절차를 밟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고 이와 함께 금산분리 완화와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법인세 인하 등을 입법 추진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항하여 민주노총 등 노동계는 6월부터 민영화 저지를 포함해 적극적인 대응을 준비하고 있어 쇠고기 수입 개방에 이어 민영화를 두고 정부와 국민의 대립이 이어질 전망이다.


“물도 민영화되고 한전과 의료보험이 민영화되면 월급 받아서 전기요금과 수도요금 내고 병원 한 번 가면 월급이 다 없어질 수도 있겠다.”

어느 네티즌의 말이다. 과연 이를 근거 없는 선동으로 몰아세울 수 있을까.


김병권 |한국사회의 진보적 대안을 찾아가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연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