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03정태인/새사연 원장

 

대통령 후보 경선이 한창이다. 자신이 대통령직에 얼마나 적합한 사람인지 알리려는, 또는 상대방이 얼마나 부적합한지 알리려는 후보들의 경쟁이 뜨겁다. 지난 여름에는 모두 잠자야 할 시간에 전국이 함성과 탄식으로 들썩거렸다. 신문을 펼쳐 보면 각 면의 머리기사 대부분은 경쟁 결과나 그 상황이 채우고 있다. 언론에 나올리 없는 우리의 ‘찌질한’ 일상도 경쟁으로 가득 차 있다. 다윈에 따르면 생물의 삶 자체가 ‘생존경쟁’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인류의 경쟁은,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은 유별나다. 생산에 관한 모든 그래프, 예컨대 인구의 숫자라든가 1인당 섭취하는 칼로리, 에너지 소비량 등은 인류 역사 대부분 기간에 거의 수평선을 그리다가 한결같이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쯤에 수직 상승한다. 이런 경이로운 발전에 관한 극찬을 가장 많이 담은 책 한 권을 고른다면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이 꼽힐 것이다.

경쟁은 인간의 물질적 삶을 풍요로 이끌었다. 그러나 언제나 경쟁이 괜찮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최근 번역된 ‘경쟁의 종말’에서 코넬대의 로버트 프랭크 교수는 사회 전체의 파멸을 불러오는 경쟁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예컨대 화려하고 큰 수컷 공작의 꼬리, 수컷 코끼리물범의 엄청난 체중, 수컷 말코손바닥사슴의 큰 뿔이 그렇다. 이런 육체의 진화는 생산력 높은 암컷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그 진화 경쟁의 결과, 종 전체가 사자와 같은 맹수에게 잡아먹히기 딱 좋아졌다. 경쟁의 결과가 멸종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경쟁이란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정해진 끝이 있을 수 없는 상대적 지위 경쟁, 그리고 그 결과(등수)에 따라 보상의 차이가 어마어마한 경쟁이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 치르고 있는 경쟁이 딱 그렇지 않은가. 우리 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훨씬 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아이들은 옆자리의 아이와 경쟁하고 있다. 그 결과는 아이들의 창의력 고갈, 교육에 의한 세습 귀족의 탄생, 그리고 출산율 저하다. 한국 사회의 퇴보가 불을 보듯 뻔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학벌과 직업에 따라 삶이 천양지차로 갈린다. 사회의 불평등이, 보통 사람은 질 수밖에 없는 경쟁을 아이들에게 강요한다. 그 경쟁의 결과는 절망의 구렁텅이다. 아이들이 맞닥뜨릴 각종 함정 역시 우리 세대의 잘못된 경쟁이 만들어 놓았다. 평생 저금만 해도 살 수 없을 만큼 높아진 집값, 청년들이 한없이 취직 준비만 하도록 만드는 직업의 양극화 역시 바로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죽도록 경쟁한 결과가 아닌가.

만일 직업의 귀천이 없다면, 나아가 자신이 어떻게 태어나든 삶에 별 차이가 없다면 왜 이런 바보 같은 경쟁을 할 것인가?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회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무슨 공부를 하든, 무슨 일을 하든 물질적 보수와 사회적 인정을 합해서 큰 차이가 없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북유럽 나라들이 그렇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성장률도 더 높다. 이번 대선에서 이런 세상으로 가는 문을 열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아예 없거나, 우리 아이들이 아주 오랜 고통을 겪은 후에야 열릴 것이다. 모든 이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경쟁, 그리고 협동을 내세운 후보는 누구일까.

이글은 여성신문에 기고된 글입니다.

신고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