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 10 / 06 김병권/새사연 부원장

한국에서 감세 정책의 사망선고?

최근까지 한국사회에 불어 닥친 가장 큰 변화는 복지열풍이었다. 복지 요구의 분출은 지난해 지방선거와 올해 4월 보궐선거에서 잇달아 여당에게 참패를 안기고 담론지형을 흔들 만큼 위력적이었다. 심지어 이에 맞서왔던 서울시장이 스스로 사퇴하는 이변까지 연출되었다. 현 정권이 집권하던 첫 해에 ‘특목고’와 ‘뉴 타운’ 으로 대표되는 무한 경쟁과 부동산 투기 기대심리가 우리사회를 지배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엄청난 사회적 격변이라고 할 수 있다.

복지담론은 초기의 무상급식을 넘어 대학등록금, 보건의료, 주거안정, 육아와 노인복지로 까지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필연적인 귀결이지만 재원 논쟁으로 옮겨간 복지 담론은 드디어 이명박 정권의 핵심 정책 기조의 하나인 감세 정책의 근간을 흔들었다. 대기업과 고소득층의 감세 중지는 물론이고 부유층에 대한 증세 주장, 더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적인 보편 증세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야당 정치권에서도 공공연히 나오게 된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종합 부동산세 도입에 대해 ‘세금 폭탄’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던 당시 한나라당에게 일정하게 여론이 동조했던 것이 불과 5년 전 안팎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역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 결과 2012년 양대 선거를 앞두고 여론 추이에 민감할 밖에 없는 한나라당이 복지확대 요구를 제한되게나마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정부 여당의 기존 감세 정책을 손대야 하는 상황에 점점 몰리게 된다. 만약 한나라당이 감세와 복지확대를 동시에 주장하게 된다면 야당을 비판했던 ‘복지 포퓰리즘’이 다름 아닌 자신들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 추석 직전, 한나라당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정부는 법인세와 소득세 추가 감세 계획을 철회하게 된다. 2012년부터 인하하기로 했던 법인세 최고세율 22%와 소득세 최고세율 35%를 더 이상 인하하지 않고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MB노믹스의 핵심 경제정책이 정부 여당에 의해 사실상 폐기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는 논평까지 나오고 있다.

재정위기로 포장된 신자유주의의 반격

사실 기업과 고소득층에 대한 감세로 투자와 소비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논리는 지난 30년 동안 세계 경제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감세와 함께 규제완화, 민영화를 주요 정책 수단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작은 정부론’은 국가 재정을 통한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자율기능에 경제를 맡기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감세 정책도 정확히 이런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그런데 정부개입 축소, 긴축재정 정책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완전히 무력화된다. 자율적 조정기능을 기대했던 금융시장의 붕괴와 연이은 실물경제의 대 침체는 감세론자나 증세론자를 막론하고 불가피하게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 후 지난 3년 동안 대규모 재정지출을 통한 경기부양 및 급격히 늘어나는 실업자와 저소득층에 대한 정부 지원을 통해 경기를 회복시키려는 정책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물론 다른 쪽에서는 부실에 빠진 금융회사에 대한 구제 금융과 이익률이 급격히 떨어지는 기업에 대한 다양한 지원도 병행된다. 이른바 ‘국가 자본주의의 부활’이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가 온 것처럼 보였다.

세계 경제위기로 세력을 잃었던 신자유주의의 목소리가 다시 부활 조짐을 보인 것은 각 국가의 경기부양 정책의 효과가 떨어지는 반면 경기부양 역효과로 국가 재정적자 부담이 커지기 시작한 올해부터였다. 그 정점에 지난 7월 31일 미국의 채무한도 증액을 둘러싼 미국 의회의 논란과 갈등이 있었다. 티파티(Tea Party)로 상징되는 미국 공화당 보수 세력이 재정적자 누적과 늘어나는 국가채무의 위험을 과장하면서 미국정부에게 강력한 긴축재정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오바마 정부는 채무한도를 증액하는 대신 10년 동안 약 2조 4000억 달러의 재정을 감축하기로 합의하였고 아이러니 하게도 이것은 새로운 경제위기의 촉매제가 된다.

재정위기는 미국보다 유럽에서 이미 훨씬 더 심각한 상황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로부터 시작된 남유럽 재정위기는 유로 통화권 3, 4위 경제규모 국가인 이탈리아와 스페인까지 번지면서 1년이 넘도록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확산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와 유로재정안정기금(EFSF)은 남유럽 국가들에게 구제 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강력한 긴축재정과 복지지출 축소를 요구했고 이에 저항하는 해당국가 국민들과 정치권의 갈등을 촉발시켰다.

재정위기, 복지지출 축소가 아니라 증세로 번지다.

이처럼 미국과 유럽에서 재정위기 논쟁이 불거지고 재정긴축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이명박 정부는 이를 복지확대 요구에 제동을 거는 계기로 삼게 된다. 그리스 등에서의 국가 부도위기가 무분별한 복지지출에 기인한 바가 크다면서, 한국 역시 ‘복지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하고 재정균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복지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당초 2014년까지 목표로 했던 균형재정 회복 계획을 아예 1년 앞당겨 2013년까지 달성하겠다는 수정 계획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에서 터진 재정위기의 실체는 재정수지나 국가채무 규모 그 자체 보다는 ‘더블 딥’ 즉, 실물경기의 추락에서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이명박 정부의 판단은 너무 성급한 것이었다. 당장 강도 높은 긴축으로 재정수지를 맞추기에 앞서, 다시 급락하기 시작한 실물경제를 어떻게 회복시킬까 하는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한 현안이라는 점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하락하는 성장률은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떨어뜨리고 조세 수입도 줄임으로써 역으로 국가 채무비율이 커지는 악순환 구조로 빠져들게 될 것이 명확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 시작되는 경기하강 추세는 단시일 내에 극복되기 어려운 ‘장기 침체(Long Recession)'일 개연성이 매우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장기침체 우려 -> 실업과 빈곤층 확대 -> 적극적 재정정책 시행 -> 일자리 창출과 소득 보전 -> 경기회복 ->재정적자 완화라는 선순환 구조를 목표로 정부의 재정정책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다시 형성된다. 그 단적인 사례가 미국 오바마 정부가 지난 9월 8일 내놓은 4470억 달러 규모의 2차 경기 부양대책인 일자리 법안(American Jobs Act)이었다. 근원적으로 고용창출로 소득개선을 꾀하는 가운데 불평등을 완화하면서 중산층을 두텁게 하는 정부의 재정 경제개혁이 없이는, 다가오는 장기 침체를 벗어날 방도가 없으며 재정건전성 악화도 피하기 어렵다는 인식의 결과인 것이다.

재정수지 악화를 억제하면서 적극적인 재정정책으로 성장과 소득을 회복시키는 거의 유일한 해법은 대기업과 고소득층의 증세다. 미국 공화당에서도 극우를 대표하는 티파티 등이 재정긴축을 주도하면서 신자유주의 부활을 꿈꾸는 동안, ‘나에게 세금을 더 걷으라’면서 이른바 수퍼리치(super rich) 증세를 들고 나온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의 500억 달러 자산가이자 투자자인 워렌 버핏이었다. 2차 경제위기 조짐이 뚜렷하던 지난 8월14일, 뉴욕타임스 기고에 실렸던 그의 부자 증세 주장은 90% 이상의 미국 시민의 지지를 불러 일으켰고, 곧 이어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주요 선진국 갑부들의 동조를 이끌어내면서 부자증세 여론을 빠르게 확산시킨다.

뒤이어 감세 중단과 증세 정책 도입에 주저하던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국가들과 미국 정부도 긴축에서 증세 쪽으로 초점을 이동시킨다. 급기야 오바마 정부는 4470억 달러 규모의 일자리 법안의 후속 대책으로, 연 소득 20만 달러 부유층에 대한 각종 감세 폐지를 포함한 재원조달 방안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우리 정부가 여론과 여당의 압력에 밀려 지난 9월 7일 법인세와 소득세 추가감세 중단을 선언하게 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장기 침체 시대의 도래와 증세 해법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지난 30년 동안 누적시켜온 위험한 금융상품과 부동산 거품의 붕괴는 1930년 이후 최대의 세계경제위기를 초래케 했다. 그것은 또한 노동자와 서민의 소득 증대 없이 빚을 얻어 소비를 하도록 부추긴 결과이기도 했다. 거품이 꺼지고 경제가 추락하자 부채의 그늘에 가려졌던 서민들의 낮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극명하게 확인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소비회복과 경기회복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게 되고 이는 장기적인 경제구조 개혁을 수반하게 된다. 현재의 위기가 일시적인 구제 금융과 경기부양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지난 3년 동안의 짧은 회복 뒤의 재 침체 조짐이 현실로 입증해주고 있다.

세계경제는 점점 더 장기 침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기울어가는 세계 경제를 현재 거의 유일하게 떠받치고 있는 중국에 인접해 있는 환경 덕분에 한국경제가 그나마 버텨 왔지만 침체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벌써부터 올해와 내년 성장률 전망치가 속속 낮아지고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저성장’, ‘저소비’, ‘고실업’이 상당기간 지속될 향후 시대에 경제주체들인 기업과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재정 균형이 악화된 것은 국민들의 복지요구 때문이 아니라 감세 정책으로 조세부담률을 19.3%까지 떨어뜨린 정부의 실정이 오히려 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세 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을 모색할 시점이다.

또한 우리 대기업들 역시 인식 전환의 시점에 왔다. 아직 한국 재벌가에서‘나에게 세금을 더 걷으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한국의 대기업이 정부의 규제완화와 감세, 고환율 정책의 지원에 힘입어 경제위기 시기에서도 놀라운 실적행진을 이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오히려 정부의 법인세 추가 감세 중지 발표가 나자 재계를 대표하는 전경련이 즉각 반발하는 모습만 확인했을 뿐이다. 물론 자산순위 재계 2위인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이 지난 8월28일 5천억 원에 달하는 현대글로비스 주식 보유분을 기부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언론매체를 장식한 적은 있다. 증세가 아닌 일회적인 기부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외환위기 이후 13년 만에 최근 우리 사회의 핵심 이슈로 재벌개혁이 부상하고 있는 이유를 재계는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이코노미 인사이트 10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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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