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참으려 했다. 날을 세워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한다고 과연 달라질 가능성이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2010년 6월27일 이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2015년 12월까지 미국이 보유하는 데 합의했을 때도, 차라리 오바마에게 편지(‘오바마 미 대통령에 띄우는 편지’ 2010년6월28일)를 쓴 이유는 그가 얼마나 자주성이 없는가를 드러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보라. 이 대통령은 7월12일 라디오방송 연설에서 “일각에서는 전작권 전환시기 조정에 대해 국방자주권을 들어 비판하지만 시기조정은 우리의 필요에 따른 실질적이고 자주적인 선택”이라고 언죽번죽 말했다. 아무리 톺아보아도 놀라운 발언이다. 그래서다. 이 대통령의 자주권 훼손을 이미 칼럼에서 지적한 내가 대통령의 ‘반론성 발언’에 침묵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놀라운 ‘자주’ 발언

내가 대통령의 발언을 놀랍다고 본 일차적 이유는 그의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대통령은 “유럽에는 많은 강국이 있지만 미군 사령관이 지휘하는 나토가 지역안보의 기본 틀”이라며 “우리의 전작권 문제도 동아시아지역과 세계안보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부르댔다. 대통령의 발언만 보면 마치 유럽의 여러 나라가 대한민국처럼 전시작전통제권을 아예 미국에 넘겼다고 판단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전혀 아니다. 만일 대통령이 그 사실을 알고도 그렇게 말했다면 국민 기만이고, 모르고 그렇게 말했다면 무능의 자기폭로다. 어느 쪽이든 놀라울 수밖에 없는 주장이다.
게다가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해 “뜻밖의 성과가 있었다”며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추진시한까지 정하면서 조속한 타결 의지를 강하게 천명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오바마는 그냥 타결 의지를 천명한 게 아니다. “조정”을 이야기했다. 이 또한 일부러 그 사실을 은폐했다면 국민 기만이고, ‘조정’이라는 말에 둔감한 것이라면 무능의 폭로다.

더 놀라운 일은 그것을 ‘자주적 선택’으로 강변한 데 있다. 그가 자주적 선택이라고 강변하는 연설을 들으며 나는 문득 얼마 전 해남농민회 초청강연을 갈 때 다시 읽었던 김남주 시집 <사랑의 무기>를 떠올렸다. 시인이 감옥에서 얻은 몹쓸 병으로 눈을 감은지 어느새 16년이 흘렀다. 하지만 시인이 남긴 시는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시퍼렇게 살아있는 시인 김남주의 칼날

가령 시 <어머님께>를 보라. “일자무식 한 평생으로/ 자식 사랑밖에는 모르시는 어머니”께 시인은 절창한다.
“지금 이 나라에는/ 보수와 진보가 있는 게 아니어요/ 우익과 좌익이 있는 게 아니어요.”
곧이어 시인은 단언했다.
“매국노와 애국자가 있을 뿐이어요/ 그 중간은 없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어머니.”

더러는 시인의 전투적 서정성을 1980년대식 논법이라고 넘기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가. 전작권 환수 연기를 공론화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전작권을 미국에 더 오래 넘겨주면서 오바마에게 되레 “사의”를 표명하는 저 한 나라의 대통령을, 우리 어떻게 불러야 옳은가.
그를 비판하긴커녕 오히려 찬가를 읊어대고 FTA에 대해서도 필요성만 부르대는 저 부자신문의 살찐 언론인들을 어떻게 호명해야 옳은가.

해남에서 김남주 생가를 찾아 고인의 아우 배려로 시인의 집필실에 잠시 머물 수 있었다. 그 시인의 거처에서 냉정히 짚어보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보수’일까, ‘매국노’일까를.

다시 이 대통령이 자주성을 운운한 연설을 비판하는 칼럼을 쓰면서도 지금 이 순간 하릴없이 참담해온다. 고 김남주 시인의 전투성에 견주면, 오늘 내가 부르는 ‘노래’는 얼마나 비루한가. 나의 ‘무기’는 얼마나 날이 무딘가.

손석춘 2020gil@hanmail.net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