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새사연 이사


 


지나온 한국의 민주화투쟁 역사를 보면 일정한 법칙이 발견된다. 민주화 투쟁은 매 순간 일정한 한계를 드러냈으나 그 한계를 딛고 다시 한 걸음 전진해 온 역사였던 것이다. 한계야말로 전진의 동력이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4월 혁명은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승만 장기 독재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요즘 자주 나온 대통령 하야투쟁이 실질적인 성공을 거둔 사례였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박정희가 이끄는 5.16군사쿠데타를 맞이하면서 4월 혁명은 여실히 한계를 드러냈다. 5.16군사쿠데타 당시 그 어떤 저항도 없었다. 4월혁명 이후 거리를 가득 메웠던 시위대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결정적 요인은 군부의 총칼 앞에 목숨 걸 각오가 되어 않았다는 데 있었다. 조정래 소설 <한강>에는 4월 혁명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대화 내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이거 다 된 밥에 재 뿌린 건데, 이렇게 당하고 있어야만 되나? 한 번쯤 밀어붙여 봐야 되는 거 아냐?"

"목숨이 몇 갠데? 극형이라는 말 아직 안 들려?"

"괜히 똥폼 잡지 말어. 군대에서 말하는 시범쪼로 걸렸다간 국물도 없어. 저치들 지금 지네들 위신 세울려고 아무나 하나 걸려들기만 바라고 독이 올라 있는 것 몰라?"


4월 혁명의 한계를 딛고 군부의 총칼 앞에 목숨 걸고 투쟁할 수 있기까지 무려 19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역사를 한 단계 도약시킨 위대한 투쟁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만들어졌다. 1971년 대통령선거부터 본격화된 박정희 정권의 노골적인 호남 차별은 호남인들의 가슴 속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겨 놓았다. 한은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목숨 건 항쟁의지로 폭발했다.


5.18민주화운동에서 시민들의 결사 항전은 세 단계에 걸쳐 비상했다. 첫 번째 단계는 5월 20일부터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항쟁에 적극 가세한 것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5월 21일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에 맞서 시민군을 결성한 것이었다. 세 단계는 5월 27일 계엄군의 최후 진압 작전에 맞서 시민군이 도청을 사수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복잡한 토론 과정 없이 본능적 대응으로 이루어졌다. 중요한 것은 광주 시민은 극한 상황에서도 단 한순간 물러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군부 앞에 타협하고 굴복할 여지를 원천적으로 제거한 것이 바로 5․18광주정신이었다.


1980년 5월 광주는 군부의 총칼 앞에 굴복했던 4월 혁명의 한계를 과감히 뛰어넘었다. 5.18광주는 민주화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광주의 세례를 받은 학생운동을 필두로 민주화투쟁의 파노라마가 장엄하게 펼쳤다. 하지만 5.18광주에서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항쟁에 참여했던 광주 시민 자신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느꼈던 지점이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지역적 고립’이었다. 광주 시민들은 제발 다른 지역에서도 함께 일어나 주기를 갈망했으나 전혀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는 외로운 도시였다. 이 사실은 이후 무수히 많은 지역들로 하여금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 부채의식을 갚는 것은 군부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투쟁하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이를 입증할 기회가 왔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활화산처럼 폭발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군부대를 투입해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만간 군부대가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자하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시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먼저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이 남달리 강했던 부산 시민들이 치고 나갔다. 일단의 학생들이 분신을 각오하고 가톨릭회관 옥상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가운데 수십만의 부산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투쟁의 여파는 곧바로 전국 각지로 펴져 나갔다. 상황은 더 이상 군부대 투입으로 제압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민주화투쟁이 승리한 것이다.


6월 민주항쟁은 군부에 맞서 목숨 걸고 투쟁했다는 점에서 5.18광주정신을 계승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지역적 고립이라는 5․18광주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수많은 지역이 투쟁에 동참했다. 천안은 3.1운동 이후 처음 시위를 경험했다. 충주는 단군 이래 처음이었다.


6월 민주항쟁은 민주화를 정착시키는 역사적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민주화투쟁 성과를 제도권에 온전히 안착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1987년 12월 직선제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결정적인 순간에 민주화투쟁을 이끌었던 김대중․김영삼 양김씨가 갈라서고 말았다. 결과는 군부 출신인 노태우에게 승리를 헌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태는 1990년 3당합당으로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보수 절대 우위 시대가 열렸다.


촛불시민혁명은 보수 세력을 붕괴시켰다. 보수의 정치적 구심인 새누리당도 두 조각내면서 코너로 몰아세웠다. 남은 과제는 성과를 제도권에 안착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다수 시민들이 그에 대한 긴장의 끈을 늦추고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일차적으로 조만간 치러질 가능성이 큰 대선 결과를 통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존 정치판 흐름에 매몰되지 않고 냉철하게 대선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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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