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새사연 이사 




촛불시민혁명은 현재진행형이다. 아직도 우리는 그 한복판에 머물러 있다. 그러한 이유로 촛불시민혁명이 어떤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지 단정 짓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따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촛불시민혁명을 일으킨 중요한 정치 지형의 변화 한 가지를 읽어낼 수 있다.


정치평론가들은 종종 정치 거목들을 가리켜 정치 9단이라고 표현한다. 과거 김대중 김영삼 등이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박근혜를 정치 9단으로 보기도 한다. 도대체 이들 정치 9단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양자 구도 설정 능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980년대 민주화 투쟁 시기로 돌아가 보자.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김영삼 양김씨는 일관되게 민주 대 독재 구도를 유지했다. 민주 진영 안에서 반미 등 이념을 둘러싼 갈등이 빚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미국과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온갖 입력과 회유가 있었지만 민주 대 독재 구도를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수 국민은 민주의 편에 섰고 독재 세력은 고립되었다. 마침내 1987년 6월에 이르러 민주 진영은 승리를 거두었다. 1990년 3당 합당은 민주 대 독재 구도를 뒤흔들어 놓았다. 민주 세력은 분열되었고 반공을 앞세운 보수 절대 우위가 유지되었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양자 구도를 유리하게 전변시키기 위한 회심을 카드를 모색했다. 그 일환으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되었다.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변화했다. 다수의 국민들은 남북 당국의 협력을 바탕으로 한 평화 정착이 최고의 안보 전략임을 깨달았다. 정치 지형은 다수의 평화 세력 대 소수 냉전 세력 구도로 재편되었다.


정치 지형 변화의 여파로 개혁 대 수구의 대결이라는 새로운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 구도는 노무현 정부의 탄생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하루 전날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과의 후보 단일화를 파기했다. 보수 진영은 단일화 파기로 정몽준 지지자들의 표가 쏠리면서 이회창 후보가 낙승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결과는 노무현 후보의 승리로 나타났다. 스스로를 개혁 진영의 일원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정몽준 지지자들은 단일화 합의 파기에 관계없이 같은 진영의 후보로 여긴 노무현에게 표를 던졌던 것이다.


2002년 대선에서의 패배는 보수 진영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그 와중에서 문제의 핵심은 양자 구도에 있음을 날카롭게 꿰뚫어 본 정치 그룹이 있었다. 그 한복판에 박근혜가 있었다. 그리고 박근혜는 좌우 양자구도를 형성하였다. 2004년 4.15총선이 끝나고 몇 달이 안 되어 사학법 개정을 둘러싼 첨예한 대치 국면이 형성되었다. 바로 그 때 새로이 한나라당 대표를 맡은 박근혜는 당을 장외투쟁으로 몰고 가면서 특유의 간결한 메시지를 던졌다. “좌파 정부, 투자 부진, 민생 파탄” 사학법 개정을 추진하는 노무현 정부는 좌파 정부이고 그래서 투자 부진을 초래하는 바람에 민생을 파탄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수층은 박근혜의 메시지에 쉽게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발맞추어 보수 언론 매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기사를 좌우 구도에 비추어 써 내려갔다. 좌파와 우파는 언제 어디서나 사용되는 기본 용어가 되었다. 좌우 구도 자체를 뛰어넘는 상상력은 철저하게 봉쇄했다.


좌우 구도로의 재편이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두 개의 이슈가 제기되었다. 두 개의 이슈 중 하나는 삼성이 던진 것으로 알려진 한미FTA 추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부가 요구한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었다. 한미FTA 추진과 제주해군 기지 건설을 둘러싼 입장 차이로 평화 개혁세력이 완전 두 조각나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는 적극 추진하는 입장이었는데 반해 평화 개혁 세력 상당수가 반대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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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