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님께 첫

편지를 띄우는 오늘은 8월15일입니다. 대한민국 60년을 두고 찬가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건국절’로 화려하게 축제를 열자는 부르대기가, 4월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이승만을 ‘국부’로 삼자는 주장도 거침없이 쏟아집니다.

보십시오. 촛불이 100일 넘도록 타올랐음에도, 우리 역사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어둠은 외려 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촛불을 든 민주시민들은 시나브로 지쳐가고 있습니다. 터놓고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사람들 사이에 좌절과 절망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님께 편지를 쓰는 까닭입니다.

님의 좌절과 절망,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경쟁 중심’을 내건 후보의 당선도, ‘공영방송’의 노골적 장악도, 엄연한 현실이니까요.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불탄 남대문까지 넘실대던 촛불바다의 추억이 강렬해 더욱 그렇겠지요.

하지만 냉철할 때입니다. 님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200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이겼을 때였지요. 적잖은 사람들이 국민을 비웃었습니다. 여기서 ‘적잖은 사람들’은 수구세력이 결코 아닙니다. 스스로 ‘개혁’과 ‘진보’를 자처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국민의 ‘낮은 정치의식’을 들먹이는 조소가 서슴지 않고 나왔지요. 2008년 4월 총선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나라당이 과반의석을 갖자 다시 국민의식을 탓했습니다.

그 불신의 캄캄한 어둠을 촛불이 단숨에 밝혀주었지요. 님이 지켜보셨듯이 촛불은 5월2일 청소년의 몸에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촛불의 노래가 서울 도심은 물론, 골골샅샅 전국으로 들불처럼 퍼져갔습니다. 촛불이 흐르는 도심의 붉은 강에서 저 또한 님처럼 눈을 슴벅였습니다. 폭우 속에서도 촛불을 끄지 않는 모습은, 촛불과 촛불이 서로 도닥여주는 풍경은 잊을 수 없는 감동의 물결이었지요.

하지만 촛불바다 앞에서 과도하게 국민을 예찬하는 사람들이 저는 미덥지 않습니다. 4월말까지만 해도 선거 결과를 두고 국민을 조롱하거나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단언하던 사람들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위대한 국민’을 들먹이거나 한국 민주주의에 찬가를 읊어대었습니다. 마침내 ‘촛불혁명’과 ‘국민 승리’까지 선언하는 현실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저는 그 놀라운 돌변 앞에서 님을 걱정했습니다. 님께서 마음이 허허롭지 않았을까 우려했습니다.

무릇 사람에 대한 지나친 예찬은 불신 못지않게 옳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있는 그대로 님을 사랑하는 성숙한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선-총선 직후의 국민 불신과 촛불바다에서 국민 찬가는 얼핏 정반대의 현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깊숙한 곳에선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국민과 더불어 문제를 지며리 풀어가려는 자세의 결여입니다.

대선 결과를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의 눈으로 차분히 톺아보시기 바랍니다.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진 이른바 ‘민주정권 10년’동안 부익부빈익빈이 커져갔고,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졌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가운데 자살률 1위입니다. 자살만이 아닙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이 대낮에 ‘민주정권’이 휘두른 폭력에 맞아 숨졌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정권을 심판하고 싶은 의지에 더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실낱희망으로 이명박에게 표를 던진 사람이 많았지요. 그 선택을 일러 “정치의식이 없다”며 우리 돌 던질 수 있을까요?

이명박이 ‘지푸라기’임은 일찌감치 탄로 났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부자신문’ 못지않게 철저한 ‘부자정권’임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더구나 친미사대주의마저 부자신문을 빼어 닮았습니다. 미국산 쇠고기의 굴욕적 전면 수입을 청소년들이 앞장서서 비판하고 기성세대가 대거 참여한 까닭입니다.

하지만 촛불을 든 민주시민 가운데 적잖은 분들이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는 찬성하고 있습니다. 감동에 겨워 눈시울 적시는 일 못지않게, 있는 그대로 민중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것은 결코 어둠과 타협하는 길이 아닙니다. 정반대이지요. 민중이 처한 삶의 현실을 바탕으로 민중과 더불어 어둠을 물리치는 길입니다. 그 길은 다름 아닌 자신이 민중의 한 구성원이라는 진실을 확연히 각성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아직 새벽이 오지 않은 8월15일, 님께 첫 편지를 띄우며 머리 숙여 제안 드립니다. 우리 개개인이 바로 민중임을 잊지 말기를, 우리 자신에 대한 과도한 절망과 과도한 희망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락가락 하지 말기를. 촛불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첫 번째 교훈입니다.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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