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30                                                                                                           강세진 / 새사연 연구이사

#1.

기원전 1000년경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제신(帝辛)은 시쳇말로 꽃미남이었으며 총명하고 언변이 뛰어났다. 게다가 힘까지 장사였으니 후대의 부러움을 살 만한 문무겸비의 재목이었다. 제신은 천지신명에게 충실하게 제사를 지냈고 동쪽의 오랑캐를 평정해 은나라의 국세는 날로 왕성하게 되었다. 또한 전통적 제사방법인 인신공양을 폐지하여 잔인한 풍속을 시정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제신이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 자신의 우월함에도 있겠으나, 형제나 숙부 등에게 계승되기도 하여 어지러웠던 왕위의 상속이 네 차례에 걸쳐 부자지간에 이뤄지게 되면서 정국이 안정된 것에도 기인하였다. 더군다나 제신은 적장자로서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 옛날에 누가 제신의 권위에 맞설 수 있었겠는가.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라고 했다. 제신의 은나라가 강성해질수록 주변 소국은 위축되고 크나큰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청동기로 무장한 제신의 군사들은 반발하는 주변국들을 유린하고 재물을 빼앗았으며 수많은 포로들을 거두어 노예로 삼았다. 은나라에 대한 원망이 날로 늘어갔다.

무력으로 주변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병사가 필요하고, 그 병사들을 먹일 수많은 군량이 필요하고, 수많은 병장기가 필요했다. 제신은 세금을 올렸다. 수많은 장정이 전쟁터에 나가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했는데 세금까지 오르니 민심이 흉흉해졌다. 연전연승에 취한 제신은 천지신명의 고마움을 잊고 제사도 소홀히 하였다.

제신이 강력한 권력을 휘두를 때마다 권력의 무상함을 아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 섞인 고언도 늘어갔다. 옳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지겨운 법. 제신은 우혼과 비중처럼 기분 좋은 소리만 골라하는 자들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과오는 묻히고 성공만 기억에 남는다. 뜻대로 모든 일이 굴러가는듯하여 기분은 좋은데 어째 허탈하다.

갖고 싶은 모든 것을 빼앗아 취했다. 그래도 허전함이 가시지 않았다. 달기와의 사랑도 공허함을 채우지는 못했다. 호수를 술로 채우고 숲을 고기로 메워 매일 잔치를 벌이며 허기를 달래보려 했다. 즐거움도 잠시일 뿐이라 어째 언짢음만 늘어가던 터에 어릴 적부터 친했던 친지 기자가 와서 잔소리를 한다. “상아로 만든 젓가락을 쓰면 보통 그릇에 만족하지 못하고 옥구슬로 그릇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옥구슬로 그릇을 만들면 그 그릇에는 보통의 음식은 담지 못하고 진수성찬만을 담아야 할 것이다.” 제신 스스로도 사치로 욕심을 채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있었겠으나, 자신보다 한참 못난 친구의 충고가 힐난으로 들려 참지 못하고 역정을 내었다. 제신에게 희망이 없다고 느낀 기자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 몸을 피했다.

점점 강한 쾌락을 추구하니 종국에는 가학을 즐기는 지경에 이른다. 제신 스스로 폐지하였던 인신공양을 여흥으로 즐기기까지 하였다. 온화한 성품으로 신망이 높은 친지 비간이 참지 못하고 그만둘 것을 간하였다. 자신에 대한 수군거림이 거슬리던 차에 비간의 간언이 제신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듣자하니 성인은 심장에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던데, 나를 위해 보여주지 않겠는가?” 제신은 비간의 심장을 갈라 죽였다. 모두 복지부동할 뿐, 이제 제신 곁에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영민한 명군은 사라지고 잔혹한 폭군만 남았다. 자신에게 반기를 든 세력의 수장인 구후는 젓갈로 담그고 악공은 육포로 만들었다. 이웃 주나라의 서백 창에게는 그의 첫째 아들을 죽여 죽을 끓인 후 강제로 먹이고 영지와 재물을 빼앗았다. 이제 은나라는 모든 국가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결국 서백 창의 둘째 아들 주무왕을 중심으로 각국의 군사들이 결집하여 목야에서 제신의 칠십만 대군을 물리치고 은나라를 무너뜨렸다. 멸망의 순간 제신은 자신의 궁을 불사르며 그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일설에 따르면 불타는 궐 속에서 껄껄거리며 웃었다고 한다. 드디어 만족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인의 만족을 위한 세상의 대가가 너무 컸다. 후대에 사가들은 제신을 주(紂)라 불렀다. 도리를 잃고 선을 해친다는 뜻이다.


#2.

얼마 전 모 지방자치단체에 자문을 하러 갈 기회가 있었다. 예전 같으면 박사학위 외에는 내세울 것 없는 재야의 연구자에게까지 자문을 구하지 않았을 텐데, 지방자치에 대한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이면서 풀뿌리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시민사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라 여겨져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였다.

“…께서 지시한 사항을 정리하자면, 이 사업을 통해 독거노인 자살률이 감소했다든지 아니면 주민우울증이 줄어들었다든지 등의 구체적인, 시민 분들에게 발표할 수 있는 그런 지표를 만들어야 합니다.” 담당 주무과장의 말이 끝나고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성과의 대상인 그 사업은 실시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민들과 집단으로 구성된 지역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최소한 15년에서 20년은 지속적으로 집행되어야 하는데 1년 만에 성과나 변화를 측정하라는 것은 무리이다. 역시나 참여한 전문가들이 모두 무리한 요구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무리하다는 의견이 쏟아지자 좌장격인 모 교수께서 호통을 친다. “… 이제 와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다음 달에 단체장이 대 시민발표를 하면서 2기 사업을 선포해야 한다. 시민들에게 들려 줄만한 성과 없이 대 시민발표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체계적인 지표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 시민들이 알아들을 만한 지표를 만들라는 것이다. 그걸 못하겠다면 이 연구는 쓸모가 없다. 왜 연구용역을 맡은 것인가? …” 요즘은 시민을 파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시민을 위해서 지표를 만들라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실제로는 단체장이 야심차게 시행한 사업의 성과를 드러낼 수 있는 홍보용 지표를 만들어달라는 요구로 들렸다. 그것도 아직 제대로 시행한지 1년도 되지 않은 사업에 대해서.

말이 되지 않는 요구에 울상이 된 연구진이 안쓰러워 몇 마디 의견을 냈다. 이 사업은 단체장의 치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민을 위한 것이다. 시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단체장의 대 시민성과발표가 아니라 이 정책이 제대로 수행되어 자신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려면 그럴듯한 지표를 만들기보다 실제로 사업의 성과를 제대로 짚어볼 수 있는 장기적인 지표를 만들어야 한다. 본질을 잃은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런 의견이 받아들여질 리가 있겠는가. 이미 단체장의 지시가 있었고, 현장의 담당자들은 그대로 따라야 하는 처지일 뿐인데.

위에 서술한 사례와 비슷한 일을 여러 지자체에서 많이 겪는다.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단체장의 성과를 드러내고 싶어 안달이다. 그것이 무리한 요구라는 것은 현장의 실무자와 시민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단체장에게 직언을 하지 않는다. 몇 년 있다 그만둘 단체장에게 대들어서 괜히 찍힐 필요가 있겠는가. 그냥 시늉만 하면서 복지부동하고 유난스런 소나기가 지나가길 기다리면 되는데. 자리를 나서며 지방자치나 풀뿌리민주주의가 정착되기는 요원한 것인가라는 씁쓸한 생각에 잠긴다.

원래 개발주의를 등에 업고 당선된 단체장의 경우에는 이런 행태를 보여도 그러려니 한다. 지방자치에 관심이 없는 흔한 모리배라고 비판하면서 속이라도 후련해질 수 있다. 하지만 특별한 정치세력의 후원 없이 시민들의 힘으로 당선된 단체장들이 이런 행태를 보일 때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성과에 집착하라고 당신을 뽑은 게 아니란 말이다….

시민을 위한 행정을 펼치겠다는 꿈을 갖고 당선된 단체장들이 이런 행태를 보이는 것도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간 사회주류의 논리에 젖어 구태에 익숙한 공공조직의 기득권과 복지부동에 절망과 조급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실제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현장의 담당자들이다. 왜 성과를 내지 않느냐고 닦달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지속적인 소통과 대화를 통해 설득하고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어차피 시민을 위한 행정은 달성되지 않는다.

앞서 제신의 몰락과정에서, 그리고 수많은 영웅들이 폭군이나 독재자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흔히 보게 되는 사례가 자기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현명하고 옳다고 여기며 안하무인이 되고 소통을 하지 않는 것이다. 시민의 힘으로 당선된 단체장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은 행정을 혁신하려는 선이고 기존의 행정조직은 그에 반발하는 못난이들이라 여겨진다면 스스로 폭군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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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