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이슈2008.07.17 11:14

“봐라 화수분이 아니냐. 암만 따내도 여전히 지천이잖니?”

어릴 적 할아버지는 내 손을 이끌고 텃밭에서 저녁상에 올릴 깻잎과 고추를 따며 이렇게 말씀 하셨다. 그때만 해도 나는 화수분이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만 할아버지의 흡족한 표정으로 미루어 ‘화수분이란 작물(?)은 상당히 농사가 잘되나 보다’라고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화수분을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흘러 중학교 때 한국 대표 단편문학선집을 읽으면서였다. 선집에는 일제 치하에서 작품 활동을 한 소설가 전영택의 ‘화수분’이란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었다. 예전 기억이 떠올라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재물이 자꾸 생겨 아무리 써도 줄지 않음을 일컬음’이라고 뜻을 풀이했다. 화수분은 내 짐작과 달리 농작물 이름이 아니었다. 황하의 물을 가득 담은 그릇이 있어 아무리 퍼내 써도 그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중국 고사의 하수분(河水盆)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3년반 동안 53조를 팔아치운 외국인

최근 우리나라

증시에서 외국인들의 연이은 매도를 보며 새삼 화수분이 떠올랐다. 한국 주식시장이 재물이 끊이지 않고 솟아나는 화수분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 다만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 투자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외국인들은 2005년부터 한국 증시에서 순매도로 돌아서 2005년 2.4조, 2006년 11.2조, 2007년 24.6조 원 어치의 주식을 계속 팔아치웠다. 올해는 7월 16일 현재까지만 이미 14.4조를 순매도해 연간 최대 순매도 규모였던 작년 기록을 갱신할 기세다. 3년 반 사이에 약 53조 원을 한국 증시에서 빼내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의 이 연속 순매도 규모는 지난해 상장 12월 결산법인 555개사가 거둔 연간 순이익 총합계 49조 원보다 큰 것이며 올해 우리나라 살림살이에 쓸 국가 예산(256조 원)의 약 1/5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이처럼 많은 돈을 한국 주식시장에서 외국인이 빼가고 있건만 지난해 말 기준으로 외국인의 한국 증시에서의 비중은 32.3%로 여전히 영향력이 높기만 하다.

외국인은 원래 한국 증시에 대규모로 투자했으므로 실컷 빼가고도 많이 남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외국인에게 우리나라 기업 주식을 살 수 있도록 문호를 처음 개방한 것은 1992년 김영삼 정권 때이다. 이로부터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까지 6년 동안 외국인의 순매수액은 총 8.6조 원이다. 1997년 말 외국인의 주식 보유 총액은 9.59조 원으로 투자액보다는 크지만 금리 수익을 따져 환산하면 크게 남지도 밑지지도 않는 정도였다.

한도 100% 확대 그러나 2.8조 순매도

그러나 외환위기를 전후로 사정은 급변한다. 발등의 불인 달러 부족을 메우기 위해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금융 개방 정책으로 인해 1997년 한 해에만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가 23% → 26% → 50%로 세 번이나 확대되는 조치를 밟았다. 기업을 설립했거나 현재 경영하고 있는 대주주의 고정 지분을 고려할 때 투자한도 50%는 사실상 무제한적인 투자를 용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다음해인 1998년 5월에는 또다시 외국인 투자한도를 100%로 확대함으로써 국내 주식시장에 대한 외국인 투자 규제를 전면 철폐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1998년부터 2008년 7월 16일 현재까지 외국인의 한국 주식시장 순매수 누계 금액은 아이러니하게도 -2.8조 원이다. 증시 전면 개방에도 불구하고 약 10년간 외국인의 매도액이 매수액보다 더 크다는 뜻이다. 더더욱 가관인 것은 외국인의 국내 증시 비중(거래소 시장 기준)은 1997년 말 13.7%에서 2007년 말에는 32.3%로 오히려 두 배반 이상 늘었다는 사실이다.

자, 여기까지 전개한 이야기를 집약하면 이렇게 된다. 1997년 외환위기까지 외국인은 국내 주식시장의 13.7%만을 보유했으며 주식 평가액은 9.6조 원이었다. 그리고 이후 10년여 동안 외국인은 한국 증시에서 순매수가 아니라 2.8조 원을 순매도한 매도 주체였다. 올해 매도분을 제외한다 해도 10년간 순매수액 합계는 겨우 11.6조 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외국인의 국내 주식 보유 비중은 32.3%로, 평가액은 307조 원으로 30배 이상 대폭 늘어났다.(2007년 말 거래소 시장 기준) 이러니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 증시는 그들이 필요할 때 아무리 퍼가도 여전히 재화가 지천으로 남아도는 ‘화수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옛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묘한 그릇은 저절로 재화가 생겨나게 할지 모르나 현실 세계, 특히 금융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금융 거래는 결국 제로섬 게임이다. 어떤 사람이 엄청난 수익을 올린다면 반대편에서는 그와 동일한 금액만큼을 누군가가 꼭 잃어주어야만 한다. 어릴 적 구슬로 홀짝놀이를 한 기억을 떠올려 보면 간단하다. 천하의 홀짝 귀재라 할지라도 잃는 아이들 구슬의 총합계 이상을 딸 수는 없는 것이다. 주식시장 단기 매매 차익의 원리는 홀짝놀이와 아무 차이가 없다.

물론 주식에 투자된 납입 자본은 기업의 생산 자본으로 사용되어 장기적으로 기업의 가치와 규모를 키우는 데 일조하고 그에 따라 주가도 오르는 또 다른 속성도 지닌다. 그러나 이것은 단기 투기거래가 아닌 장기 투자에서 그리고 어디까지나 실물경제의 성장률을 반영하는 범위 안에서만 타당성을 지닌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는 잠재성장률을 하회하는 저성장에 시달려왔다. 국내총생산은 1998년 484조 원에서 2007년 901조 원으로 1.8배 성장했을 뿐이다. 이 사이 외국인의 보유주식 평가총액이 30배로 불어난 것은 결코 한국경제의 실물적 성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그릇을 채운 자 누구인가

실물경제 성장을 상회하는 외국인의 과도한 자본 수익의 이면에서 누가 대신 고통을 충당하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가 가능하다.

먼저 국내의 개인 및 기관투자가들이다. 외환위기 직후의 주가 침체기에 외국인이 한국 주식을 양껏 사들였다면, 국내의 개인 투자자들과 기관은 2005년 이후 본격적으로 주식 매수에 나서면서 외국인의 매물을 받고 있다. 특히 지난해는 전국이 펀드 열풍으로 들끓은 한해였다. 주식형, 채권형, MMF 등을 포함한 펀드 계좌가 2,000만개를 돌파하여 1가구 1펀드 시대를 맞이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금융 시장의 위험성이 이미 노출된 상황에서도 ‘펀드를 대체할 장기 투자 수단이 없다’는 금융기관과 언론의 장밋빛 예찬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2007년 9월 말 적립형 주식펀드가 최초로 1,000만개를 돌파했다. 그리고 불과 한 달여 뒤 우리 증시는 종합주가지수 2,085포인트를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주가가 고점에서 이미 27%가 하락하는 동안 그 많은 펀드와 300만을 상회하는 개인투자자들의 손실은 고스란히 주가 거품을 조성한 외국인의 수익으로 귀결된 것이다.

직접투자나 펀드 투자를 하지 않은 국민들은 이 피해에서 예외일까? 그렇지 않다. 실물경제를 압도하는 금융경제의 영향력은 국민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친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세계경제가 요동치고 전 세계에서 주가 버블을 일으켜 막대한 차익을 거둔 금융 자본이 유가와 식량, 원자재 투기에 달려들 때 그 피해는 펀드와 전혀 무관한 서민에게도 돌아온다. 금융 경색과 금리 인상, 물가 폭등, 내수 침체라는 이름으로.

외국 자본 따라하기, 금융 추종 정책의 부메랑

사정이 이러한데도 정부를 중심으로 소위 선진화를 부르짖는 대부분의 식자들의 관심은 우리나라를 금융국가로 만드는 데 온통 쏠려 있다. 해외 펀드 투자를 대단한 국익 창출 수단이라도 되는 듯이 권장하고 몇 개 남지 않은 국책은행을 민영화하여 매각하지 못해 안달이다. 증시 개방과 OECD 가입으로 한국이 곧 선진국이 될 거라고 설레발을 떨던 외환위기 직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 결과 지금 어떤 부메랑이 돌아오고 있는가. 얼마 전 미래에셋증권은 중국에 투자한 펀드의 대규모 손실에 대해 간담회를 열고 사과를 해야 했다. 미래에셋은 해외 주식형 펀드에서 4조 원 이상의 손실을 포함해 상반기 동안에만 모두 7조 1,775억 원에 달하는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동안 국내 은행의 서브프라임 손실이 미미하다고 전해진 것과 달리 한국은행이 현재 외환보유액 2,581억 원의 15%에 이르는 370∼380억 달러 가량을 파산 위기에 처한 미국 모기지업체 패니메이와 프레디맥 채권에 투자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한국을 금융허브 국가로 만들기 위해 설립한 한국투자공사(KIC)는 미국 투자은행인 메릴린치에 나랏돈 20억 달러를 덥석 투자해 반년 만에 절반을 날렸다. 세계가 금융 불안으로 요동치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어떤 손실이 어디에서 얼마나 발생할지는 전혀 예측 불허다.

이 모두가 견실한 실물경제의 성장 없이 금융이라는 황금알 낳는 거위에 집착한 결과들이다. 선진국들이 모두 금융으로 돈을 벌어들이니 우리도 어서 서둘러 따라가야 한다는 금융 세계화 추종 정책은 이미 나라 안팎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한국 증시에서 승승장구한 외국 자본 역시 정작 자기들 나라에서 번지는 금융 위기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미국은 한때 그들의 자존심으로 내세우던 자동차 회사 제너럴 모터스의 부도설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올 정도로 제조업 상황이 좋지 않다. 실물경제의 발전과 함께하지 않는 금융 강국의 꿈은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누군가에게는 고통을 전가한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보여준 화수분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리 국민경제의 나갈 길은 결코 금융 추종 정책에서 구할 수 없다. 일자리를 늘려 청년들의 기지개를 펴게 할 때, 중소기업과 자영업의 내수 경기를 살려 나라 안에서 자체적으로 수요와 생산이 촉진될 때, 한미FTA와 쇠고기 수입개방에 근심하는 농민들과 함께 식량 위기를 돌파할 농업 기반을 조성할 때, 그리고 투기활동이 아니라 이런 생산적 경제활동을 착실하게 지원하는 금융 시스템을 만들었을 때 우리는 당당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봐라, 이게 정말 화수분이 아니냐?”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