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22                                                                                  강세진 / 새사연 연구이사



1.
책 두껍게 쓰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제러미 리프킨은 800쪽이 넘는 저서 「공감의 시대」에서 “두뇌과학과 아동발달학 분야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면서 인간이 본래 공격적이고 물질적이고 실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오래된 믿음은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면서 인간은 오히려 근본적으로 “공감하는 종(種)”이라는 새삼스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우리가 과연 적절한 시기에 지구적 차원의 공감에 도달하여 문명의 붕괴를 막고 지구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실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적 관계’ 등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황한 내용들도 있지만 이 책의 근본 주제인 ‘공감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는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2.
얼마 전 경기도의 한 공공연구기관에서 공동체주택에 대한 발표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연구기관의 부원장, 관련 연구부서의 장, 관련 연구자들을 향해서 긴장된 마음으로 경기도 차원에서 공동체주택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는데, 말주변도 없고 아는 것도 짧은 터라 장황하게 중언부언하며 썩 만족스럽지 못한 심정으로 보고를 마쳤다. 하지만 최근 청년을 비롯한 당사자 스스로 주택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반화되고 있기도 해서 그공동체주택 등이 새롭게 주목해야 할 주거대안이라는 연구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이미 서울에서는 공동체주택을 만들어보겠다는 다양한 주체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고, 서울시 차원에서도 마을공동체활성화지원사업을 수년 째 진행 중이다. ‘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을 공급하는 시범사업을 3년여에 걸쳐 추진하여 ‘가양동 이음채,’ ‘만리동 예술인주택,’ ‘홍은동 청년주택’ 등이 공급되어 많은 주목을 받지 않았는가. 발표를 다 듣고 난 후 한 연구원이 대뜸 질문을 하였다. “로버트 오웬이라고 아십니까?” 20여 년 전에 수업 시간에 들은 후에는 오웬에 대해 일부러 찾아본 적이 없어서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오웬이 뉴하모니를 주장하며 비슷한 주장을 한 적이 있는데 발표한 내용이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인가요?” 급작스럽게 재차 질문이 이어졌고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하고 있으니 “주장하는 바가 너무 이상적인 것 같다. 오웬의 뉴하모니도 결국은 실패한 것이다.”라는 평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후에도 용어의 개념이 적절치 않으니 학계에서 통용하는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둥, 발표한 내용이 결국 기존의 것들을 짜깁기 한 것이 아니냐는 둥의 비평이 이어졌고 당혹스런 심정으로 발표를 마치고 돌아왔다.

아직 연구자로서 더욱 열심히 정진해야 할 입장이니만큼 발표한 내용의 부족한 점에 대해서 변명할 거리는 없다. 다만 ‘공동체주택’이라는 얘기를 듣고 발표 내용에는 들어있지도 않았던 19세기의 사회운동가의 이름을 굳이 거론하며 ‘실패’하였다는 단정적인 비판을 받은 것은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사람의 진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니 발언의 전후맥락을 따져서 짐작해 보면 ‘21세기 사회에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 주민들 스스로 뭔가를 해보겠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결국 실패할 것이다. 정책으로 타당하지 않다.’라는 의미로 읽혔다.

예전에 책상에 앉아서 연구만 하던 시절, 여러 사회운동에 대해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주민들과 직접 교류하며 현장의 고민을 함께 나누게 된 이후에는 ‘전문가’의 입장에서 ‘이론적’으로 주민들의 삶을 재단하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이었는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발표 당시 내 앞에 앉아있던 여러 ‘박사님’들에게 ‘공동체주택’이라는 개념은 이론에 맞지 않는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지도 않은 허무맹랑한 용어일지도 모르지만, 지금도 마을 곳곳에서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주거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주민들이 많다. 박사님들께서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졌다면 매몰차게 이상적이라는 평을 하거나 실패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물론 이런 생각이 발표를 제대로 못한 주제에 싫은 소리 좀 들었다고 품는 소심한 오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새로운 주거정책을 펼치기 위해서 주민뿐만 아니라 전문가들과도 폭넓은 공감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3.
2007년 겨울, 747공약을 내세운 이명박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대통령에 당선 되었을 때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살만큼 살게 된 상황에서 이제는 ‘개발’보다는 나눔, 환경, 복지 등 공공성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설마 사람들이 4대강을 훼손하겠다는 정책을 지지할까?’라는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 이후의 비극을 다시 글로 적는 것은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일 뿐이다. 이후에도 여러 선거에서 다수의 국민들은 자본친화적이고 개발주의적인 정책을 지지하였다. 집값은 올리겠지만 복지는 줄여야겠다는 정당이 아직도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고, 복지공약을 별 이유도 없이 파기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 역시 얼마 전까지 50%에 육박하였다. 재난에 대한 대응 시스템의 부재로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 물대포를 쏘아대는 오늘조차, 국민의 세 명 중 한 명은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다. 당선되자마자 적자를 빌미로 공공의료원을 폐쇄하고 최근에는 정의로운 예산 집행을 빌미로 의무급식을 못하겠다는 홍준표 지사에 대한 정책지지율도 50%에 육박한다.

사회이슈가 되었던 여러 복지정책들을 펼치는 데에 우리들 개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몫은 그리 크지 않다. 내가 몇 만원 더 세금을 부담함으로써 우리 아이들은 보다 평등한 사회에서 살 수 있다. 실로 저렴한 값이다. 2000년 대 중반 집을 가진 사람이 집을 갖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아지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부자를 꿈꾸던 다수의 사람들이 꿈을 이룬 순간 주거복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소수자로 전락하였다. 다른 이의 불행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투표권을 행사한다면 소수자를 위한 정책이 뽑힐 가능성은 이미 없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가 소수라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 할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조롱을 일삼는 ‘일베’가 공영방송의 기자로 버젓이 채용되는 상황을 보면서 우리사회의 공감능력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4.
세월호 참사 1주기였던 지난 4월16일 박근혜 대통령은 해외자원투자비리 연루자에게 불법자금을 받은 정황이 있는 총리에게 국정을 맡기고 콜롬비아로 출국하였다. 여당 일각에서도 이 시국에 꼭 가야되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대통령이 없는 서울의 광화문에서는 경찰이 세월호사건의 유족들에게 물대포를 쏘아대고 있었다. 그리고 콜롬비아에 도착한 박근혜 대통령은 연단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마르케스를 인용하며 “가슴을 가진 사람에게 망각은 어렵다.”는 말을 하였다. 세월호사건의 유족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많은 국민들을 고독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아니었기를 바랄뿐이다. 그간 보여준 행동과 행적이 대통령의 공감능력을 의심케 한다. 햇수로 3년.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후 많은 사람들이 국정의 불통으로 인해 고독 속에 놓여 있다. 실제로 이 세상 어디에도 도와줄 사람 없어서 고독 속에 죽어간 사람들도 많다. 자신의 아버지가 만든 황금물고기가 언제까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홀릴 수는 없다는 것을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 인지하셨으면 한다. 수많은 사람들을 끝 모를 고독 속에서 꺼내 줄 대통령의 따뜻한 공감을 기대한다.

덧 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교육이다. 우리는 의무교육을 표방하는 국가이다. 따라서 ‘무상’이 아니라 ‘의무’급식이 맞는 표현이다. 의무적으로 나오는 급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유복한’ 사람들은 원하는 도시락을 싸서 보내도 된다. 스스로 고독 속에 잠기겠다는 것을 일부러 말릴 수는 없는 일이다. 평등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약자보다 강자가 고독해지는 것이 모양새가 그나마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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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