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덥지근한 무더위도 어느 덧 흔적만 남겨 놓고, 창 밖으론 가을을 채근하는 비도 내리지만 마음은 답답하기 그지 없다. 2008년 금융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불러 일으켰고, 우리 사회에서도 불과 2년 전 이 맘 때 여야 후보가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외쳤다. 세월호 참사 역시 이윤을 목표로 전 사회가 움직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하지만 경제민주화는 1년도 채 안 돼 ‘경제혁신’, ‘규제완화’로, 복지는 이제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전 국민이 애닳아 눈물 흘리고 ‘유민이 아빠’는 목숨을 건 단식까지 했지만, 사건의 진상을 찾기 위한 특별법은 우리의 눈 앞에서 침몰하고 있다. 모든 위기는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는 뜻) 집단이 만들어 냈는데 오히려 ‘민주화와 복지’ 쪽이 지리멸렬하고 있다. 후안무치, 적반하장 등의 말이 절로 튀어 나오게 하는 대통령과 여당의 인기는 여전히 압도적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지난 30년간 세계를 지배한 집단은 여전히 강력하다. 2009년 G20 등에서 거시건전성 강화를 위한 금융규제 제도가 속출했지만 실제로 손을 댄 건 손가락 개수를 넘지 못하고, 시민들의 세금으로 살아난 금융기관들은 또다시 버블의 달콤함을 한껏 누리고 있다.

그들의 ‘시장만능주의’는 사회 구석구석, 우리의 일상에 똬리를 틀고 여전히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몇십만권 팔렸고, 교황이 세월호 가족을 보듬을 때 우리 모두 열광했지만, 그리고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열풍을 일으키고 있지만 현실은 요지부동이다.

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난 대선 때 경제민주화와 보편복지에 사실상 합의했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 앙등이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한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최상위 1%에만 적용되는 종부세에 ‘세금폭탄’이라는 딱지를 붙인 바 있다. 아이들이 무자비한 경쟁 속에서 죽어 가는 걸 보면서도 자립형 사립고 개혁이나 대학평준화와 같은 제도 변화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 보편복지에 찬성하다가도 누진적 보편증세라는 말을 들으면 갸웃 고개를 돌린다.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 피케티가 24살이던 1995년에 쓴 논문, <사회적 이동성과 재분배의 정치학>은 수수께끼의 열쇠를 제공한다(불행하게도 온통 수학이다). 왜 하위 집단이 자신에게 유리한 재분배 정책에 반대하는 걸까.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인근의 경험을 통해 사회이동성에 대한 판단을 하기 때문에 똑같은 경제적 지위에 속한 사람도 서로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보통 사람도 자신이 상위 집단으로 올라 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현재의 불평등 구조에 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추정을 뒷받침하는 연구가 최근 나왔다. 엥겔하트와 와그너가 쓴 <소득 불평등과 재분배에 대한 편향된 인지>를 보면 한국의 실제 사회이동성은 일본 다음으로 낮은데 자신의 사회이동성에 대한 믿음은 세계 1위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말 그대로 다이내믹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매우 사회이동성이 높은 사회였고 교육은 그 통로였다. 우리의 40~50대 이상은 스스로 그런 경험을 했거나 가까운 주변에서 숱하게 보았다. 해서 현실과 인지의 괴리가 세계 어느 곳보다 더 큰 사회가 된 게 아닐까.

현실에선 한국도 상위 10%가 전체 자산의 45%(이 수치마저 세금자료로 다시 계산하면 훨씬 높아질 것이다)를 차지하고 최상위 1%가 소득의 13%를 차지하고 있으며 양극화의 속도도 세계에서 제일 빠른 축에 속한다. 반면 사회 이동성은 급격하게 낮아지고 있다. 이것이 객관적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와 내 가족이 사회적 상승에 성공할 확률은 제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언론은 과연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리고 있을까. 혹시 우리는 1%의 호화판 삶을 친근하게 여길 정도로 대기업 실장, 성형외과 의사나 설계전문가, 그리고 ‘캔디’를 너무 자주 간접경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언론인들이나 정치인, 전문가들 스스로가 최상위 1%는 아닐지라도 상위 10%에 속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 답답함의 일단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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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